“청지기의 삶”
말씀을 전하러 간 곳에서 성경을 일독 한 것과 백 독 한 것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일독하거나 몇 독만 하면 길을 충분히 잘 모릅니다. 자신이 늘 다니는 길은 눈 감고도 찾습니다. 우리 집에서 새벽에 나갈 때 가족이 잠을 깰까 봐 실내에 불을 켜지 않고 복도를 살살 나갈 때 캄캄해도 우리 집이기에 물건에 부딪치거나 넘어지지 않고 손잡이가 어디쯤 있는 것인지를 알기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의 집에 가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호텔 투숙객이라면 호텔마다 다른 방식에 살펴 보아야 무엇이 있는지 압니다. 불을 끄고 걸었다가는 여기 저기 부딪칠 것입니다.
사람의 전통은 늘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전통은 무한합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의 원칙은 먼저 심어야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는 자에게 심을 것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후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실례를 들어 보시면 훨씬 더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까레이스키”라는 멋진 작품의 드라마를 TV에서 장기간 상영을 한적이 있습니다. “까레이스키”라고 명칭을 붙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같은 민족으로 전에 중앙아시아로 이동된 우리와 한 동포이며 “고려인”으로 우리는 부르고 중국에 정착을 한 우리 동포를 “조선족”이라고 다른 명칭으로 구분하곤 합니다. 양쪽 다 우리는 한 민족 한 자손인 것입니다.
그 드라마 중에서 가장 깊게 인상이 남았던 장면은 우리 민족이 대거 중앙아시아로 기차를 타고 이동시키는데 가지고 간 양식은 한계가 있어서 모두 배고픔에 허덕였습니다. 기차를 타고 끝도 한도 없이 우리 민족은 강제로 이동을 시키는 데로 가야만 했습니다. 지치고 배고프고 그렇게 한 없이 가는데 어른은 그래도 배고픔을 참고 간다고 해도 어린아이들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농업을 주로 한 민족이라 농사를 짓기 위하여 종자를 소중히 간직하고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도저히 어린 아이가 배고파서 우는 것을 참지 못한 한 애기 엄마가 종자를 꺼내 먹이려고 하다가 주위에 다른 일행들이 소리를 지르며 저지 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은 “종자를 먹어버리면 우리는 가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요. 안 되요. 먹지 말아요”라고 말렸습니다.
제지 당한 엄마는 슬피 눈물을 흘렸는데 중앙아시아에 도착해서 참고 아껴두었던 종자를 꺼내서 심었을 때 바로 열매가 열린 것은 아니고 기다릴 때 드디어 수확을 하며 우리 동포들은 기쁨의 미소를 서로 주고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이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심는 자에게 심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한가지 더 자세히 가르쳐 준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과부의 동전 두 렙돈을 심은 것은 부자의 많은 헌금의 액수보다 더 많은 것을 심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고백이고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며 신뢰의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싶으신 것은 바로 그 믿음의 행동인 것입니다.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면서 마지막 남은 통의 가루를 사르밧 과부가 가지고 갔던 심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훈련과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처음 신학생들을 후원하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순식간에 많은 학생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때도 나를 걱정하는 어떤 분은 환자들도 그렇게 많이 받고 신학생들도 많이 받으면 힘드니까 다른 큰 교회에 학생들을 의탁해서 하지 그러냐는 제안을 우리 선교회 팀 안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온 것이 아니고 외부에 계 신분이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큰 교회에 의탁을 한 것이 아니고 큰 교회에서 후원이 될 줄 알았다가 되지 않은 학생이나 학비는 후원하는데 매달 생활비지원이 안되어 한국에서 차비도 없고 생존이 힘들었던 큰 교회에 선발된 학생 세 명을 우리 맡아서 그들을 졸업을 시켰고 자국으로 보냈으며 지금도 후원을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지기의 삶”
마마킴||조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