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신부전증을 하나님이 고쳐주신 아들의 간증입니다 (1)
저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교회는 다녔지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5평 남짓의 작은 방에 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중고등 학교를 다닐 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4 식구가 함께 살았던 적도 있습니다. 기초생활 수급자로 어렵게 살아오면서 가정환경은 몹시 열악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았고 그때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습니다. 유치원 때 까지는 차별 없이 마냥 행복하게만 지냈지만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차별이 시작됐습니다. 가난한 아이는 어딜 가든 소외되기 마련입니다. 입는 것, 먹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에 띄고 소외됐습니다. 놀림도 매일 같이 당했습니다. 부모님이 나이가 많은 탓에 할아버지, 할머니 같다며 놀렸고 그때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놀림 받았습니다. 아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놀림 당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부모님이 두분 다 장애를 가져서 친구들은 그냥 생각 없이 놀려댔던 것을 기억합니다.
자연스럽게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고 저학년 때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마음속에는 가난에 대한 깊은 열등감과 창피함이 함께 했습니다. 어린 나이였기에 더 상처 받기 쉬웠고 무엇 보다 외로웠습니다. 공부는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한글도 제대로 쓸 줄 몰랐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저를 괴롭히던 친구가 전학을 갖고 그 때부터 제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친구도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괴롭힘 당하던 것이 끝났을 뿐 여전히 저는 내성적인 아이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정말 즐거웠던 추억도 많지만 가난이란 굴레가 제 마음에 열등감을 만들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저의 열등감은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삐뚤어진 시기를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착한 아이란 꼬리표를 달은채 마음속에는 저를 놀리던 친구를 매일 죽이는 상상을 하면서 보내는 이중적이 모습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친구를 중학교 때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친구를 향한 제 마음은 미움과 두려움, 비굴함이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비굴했던 것이 모욕적이고 그 친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 친구를 죽이는 상상을 하는 잔인한 제 모습이 괴로웠습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와 함께 한 1년을 제외하면 행복했던 시기였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을 얻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게 되고 공부도 잘 하진 못 했지만 보통은 하는 평범한 아이가 된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보통 사람처럼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상처를 받은 일도 많았지만 행복했던 순간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행복이 현실에 대한 외면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아프셨고 어머니가 가장 낮은 위치에서 힘들게 번 돈으로 전 제 행복을 위해 친구들과 놀며 쓰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놀러 다녔습니다. 모두 알았습니다. 부모님이 힘든 것. 그리고 제 용돈은 저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도와주시는 분들이 주는 소중한 돈이라는 것. 저는 모두 허비했습니다. 제 행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점점 그것을 인식하게 되고 그럴수록 제 마음에 트라우마는 더욱 커져갔습니다. 그것은 깊은 우울함이었습니다. 우울함과 죄의식 위에 행복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낙방한 후 제 인생의 어두운 시기가 찾아옵니다. 저희 집은 단칸방을 세 들어 살았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버지가 그 옆방까지 세를 놔서 방이 따로 떨어진 2개가 되었습니다. 전에 쓰던 낡은 가구와 곰팡이가 있는 천장의 창고 같은 방에서 90이 다 되신 저희 할머니와 단 둘이 지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라도 갔지만 졸업을 한 후 1년간은 밖에도 나가지 않고 오직 컴퓨터만 하면서 그 방에서 죽어갔습니다. 말 그대로 우울함 안에서 죽어갔습니다.
대학은 가야겠고 학원은 돈이 많이 들어서 싫고 고등학교 때처럼 그냥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성적도 많이 향상되었고 거기서 1년간만 더하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서 무기력한 제 자신을 봤고 끝없이 우울함과 현실 도피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오직 쾌락을 주는 컴퓨터를 잠도 안자고 했습니다. 부모님의 기대와 가난을 이겨내고 대학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부터 끝없이 도망쳤습니다. 돈이 생기면 바로 그 곳에서 나와 놀았습니다. 밖에 나갈 때는 무척 즐겁게 놀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아름다운 행복의 밑에는 부모님에 대한 죄의식이 있었습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제게 왜 평범한 행복은 허락되지 않은 것입니까? 왜 사랑하는 사람과 어두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할 순 없는 겁니까? 왜 저는 이 우울한 현실을 이겨내야만 하는 겁니까? 원망도 했고 굳게 다짐하고 발버둥도 쳐봤지만 항상 같은 곳에 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제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년이 갔고 대학은 물론 떨어졌습니다. 아예 원서도 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200만원을 주시며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돈이 얼마나 힘들게 모은 돈 인지 알았지만 저는 거절하지 않고 모두 썼습니다. 그 마음 그대로 학원이라도 다녔어야 했지만 그 돈은 다른 곳에 쓰고 돈은 다 모두 도서관을 다니면서 맛있는 점심과 저녁을 먹는데 사용했습니다. 물론 놀기도 했습니다. 수능을 보기 며칠 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저는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곳은 장학 제도가 미흡해 도저히 학비 감당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1학기만 다닌 체 다시 수능을 봐 다른 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인데 제 생활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제게 내려 졌습니다. 아버지가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점점 몸이 붓고 숨을 헐떡이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이미 할머니를 봐온 터라 아버지가 그렇게 되는 것이 너무 우울하고 겁났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작은 방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점점 씻는 것도 힘이 드셨는지 몸에선 쾌쾌한 할아버지 냄새도 났습니다. 그러면 빨리 씻겨 드리고 병원에 가야 하는데 저는 그것이 아버지가 나이가 많이 드셔서 그런 것인 줄 알았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아버지가 할머니처럼 되는 것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저는 아직 아버지의 죽음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아버지가 어찌 할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겁이 났습니다.
그러던 중 결국 병원에 가게 되었고 의사는 믿을 수 없는 말을 제게 했습니다. 아니 아버지도 듣고 있는데 너무도 냉정히 말했습니다. 이 병은 나을 수 없습니다. 불치병입니다. 못 낫는 병입니다. 아버지를 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만성 신부전증 이었습니다. 신장이 제 기능을 못해 피를 희석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그 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병으로 치료가 아닌 생명 유지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생명 유지라는 것이 인공투석기로 피를 몸 밖으로 뽑아내어야만 합니다. 이틀에 4시간씩 해야만 하는 것인데 이미 환갑도 지나신 아버지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하염없이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그 와중에도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아버지와 병원에서 함께 했습니다. 하루에 4시간씩 자며 아버지의 소변을 받아내고 온갖 검사를 하며 아버지와 함께 했습니다. 아버지는 기력이 쇠하셔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고 휠체어에 의지하셔야 했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해 변 또한 마치 토끼변 처럼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인터넷으로 알아볼수록 너무도 절망적이었기에 더욱 힘들었습니다.
피를 넣기 위한 임시 인공 관을 아버지 목에 주입해야 하는데 2차례나 실패하고 3번째에 가서야 겨우 성공했습니다. 임시 인공관은 목에 구멍을 뚫어서 하기 때문에 피를 투석하실 때 손목에다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임시 인공관 주입에 실패하자 손목 인공혈관 주입 수술이 지체 되어 결국 다른 분이 먼저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딱하게 말하던 것을 들었습니다. 화가 났지만 화조차 낼 기력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어머니께 맡겨 두고 몇 주일 만에 집에 오게 됐습니다. 아버지가 잠드신 후 새벽에 오는 것이라 우리 집인데도 너무 불안하고 무서웠습니다. 손에 칼을 잡고 집안을 살폈습니다. 그때는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듯 합니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 방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곳에 제가 선물 한 모자가 소중히 걸려 있었습니다. 항상 낡은 모자만 쓰시던 아버지였습니다. 교회 페인트 칠을 하시느라 페인트 묻은 더러운 모자만 쓰시던 아버지였는데 제가 선물한 모자는 소중히 걸어두셨습니다. 너무 눈물이 났습니다. 아버지 물건 하나하나 그 냄새 하나하나 소중히 맡아 보았습니다. ‘하나님 제발 제 목숨과 제 모든 것을 드릴 테니 제발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목 메는 소리로 미칠 듯이 애원했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김상숙 권사님이라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심적으로 이미 모두 말라버린 저에게 진심 어린 격려와 위안을 주었습니다. 가족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진정 사랑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우리 가족을 같은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병원비 또한 주셨습니다. 하루는 권사님 환갑 잔칫날 이었습니다. 가족들께서 권사님 환갑 축하금을 받자마자 곧장 우리 병원으로 찾아와서 병원비에 더 보태라며 주셨습니다. 맛있는 피자를 사 오셨던 적도 있고 매주 마다 저희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위로를 받으며 아버지가 투석으로 얼마간이라도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병이 불치병이라고 진단했던 의사 선생님이 아버지가 나을 수도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투석을 하지 않으셔도 됐고 1년간 약을 드셔서 완치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그 병원의 기적으로 연구 케이스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말하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권사님의 끝없는 사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기적처럼 회복 되셨지만 저는 기쁨이 지나 간 후에 병원에서의 충격으로 인해 깊은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언제 아버지가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깊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인지 밤마다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저희 가족을 사랑해주신 김상숙 권사님의 기대를 져 버리고 신앙 생활 또한 거의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주시고 걱정해주셨는데 저는 그런 그 분의 마음을 져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권사님은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정말 셀 수도 없이 실망하셨을 텐데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끝까지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오직 기도와 성경말씀으로 마치 식물이 물과 햇빛을 받아 살아나듯 끝없이 저에게 사랑의 양분을 주셨고 결국엔 죽은 저의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생긴 가난에 대한 깊은 열등감과 구제할 수 없는 내 자신에 대한 깊은 절망 이것들은 평생이 지나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사님께서 능히 끝임 없는 사랑과 성경 말씀으로 저를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깊이 느낄 수 있게 해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또한 제가 죄인임을 깨닫고 오직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은 것 또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권사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제 안에 깊은 증오로 남은 그 친구를 진심으로 용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처럼 제 이중적인 제 모습에 대한 트라우마 역시 없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영혼이 자유로워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셨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제 자신을 자책하고 조바심 내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늘 하루 또 내일 더 하나님의 아들에 다가갈 뿐입니다. 또 낙망하고 하나님의 길을 벗어날 때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 확신합니다. 더 이상 가난을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감에도 시달리지 않습니다. 가난이란 것은 마치 옷과 같이 계절이 지나면 바뀌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삶의 한 부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헌 옷은 벗고 내일의 영광과 존귀의 옷을 입을 입혀 주실 주님이 보입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저를 잊어버리거나 내버려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로 저를 가리키셨습니다. 고난과 실패함, 나태한 인생을 살던 저를 권사님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오늘의 저로 완전히 바뀔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와 기초생활 수급자라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대학의 몸을 담게 되어 공부 할 수 있는 행복을 주셨고 옛날의 창고 같은 집이 아닌 작지만 만족 할 수 있는 너무도 과분한 임대 아파트에서 또한 살게 해주셨습니다. 일산의 호수공원 옆에서 산책도 할 수 있는 너무도 좋은 위치에 저희 가정을 위한 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너무도 좋은 것들로 제 삶을 가득 채워 주시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고 놀랄 뿐입니다. 저는 권사님으로 인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권사님의 구원하심은 저 하나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살아오시면서 상처 받으신 저희 아버지 또한 마음의 상처를 이기고 하나님께 온전히 다가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아들로 삼아 주셨 듯 마마킴 또한 저를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신부전증을 하나님이 고쳐주신 아들의 간증입니다
마마킴||조회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