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주라 (스캇 솔즈 저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
몇 년 전 주일 오후,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는 메일을 한 통 받았다. 그날 오전에 나는 가난한 사람을 향한 연민이 성경적인 기독교에 꼭 필요하다는 설교를 했다. 그런데 그 이메일을 보낸 사람은 나를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사람들을 맥 빠지게 만드는 사회주의자요, 극단적인 좌파로 몰아세웠다. 그들이 세금을 축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보통 사람처럼 직장에 들어가면 가난에서 벗어나고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메일을 읽는데 분노가 솟구쳤다. 나는 그것이 좋은 분노였다고 절대 확신한다. 그 분노는 바로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자”와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을 자”라고 부르신 자들의 안타까운 상황 때문에 느끼셨던 분노와 동일하다.
가난한 자에게 무관심한 것은 좋게 말하면 무지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가난한 자를 아끼셨던 예수님을 무시하는 교만함이다. 예수님은 연민에 끌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삶에 끌릴 수 밖에 없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 주일에 그 사람이 정확히 무슨 이유로 내게 이메일을 보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가난한 사람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난 게 아닌가 싶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려면 힘들고 불편하고 희생이 따른다. 하지만 힘들고 불편하고 희생이 따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일일 때가 많다.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던 게 분명하다. 남들은 외면했지만 예수님께는 환영 받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그분 나라의 상속자로 부르셨는지를 보면 말이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진정한 믿음은 불의에 맞서 싸우고 압제 받는 자를 해방시키고 짐을 덜어주며, 굶주린 자를 먹이고 가난한 자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며, 벌거벗은 자를 입힌다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나눠 줘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종교는 고통 중에 있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사야는 한 걸은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가난한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졌으며 그들을 우리 혈육처럼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가족’처럼 대해야 한다.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행4: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싫은데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베풀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가 그 주일 오후 가난한 사람을 비난하는 이메일을 받았을 때 느꼈던 안타까움을 그 옛날 모세도 느꼈다. 왜 가난한 사람을 싫어하는가? 왜 폄하하는가? 왜 정죄하는가? 무엇보다도 성경이 가난한 사람에게 그토록 연민과 동정이 가득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왜?
주된 이유는 건망증이다. 빈손이든 돈방석에 앉아 있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똑같이 낮아진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탓이다. 우리 모두는 거지이며, 오직 예수만만 떡을 갖고 계신다. 예수님 자신이 떡이시기 때문이다.
무지와 교만의 조합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가난하게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모를 수 있다. 또한 자신이 누리는 특권과 힘, 부가 부모를 잘 만나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는 교만한 생각에 빠질 수 있다. 대부분의 특권층이 특권층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대부분의 빈민층이 빈민층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간과하기 쉽다. 가난이 가난한 사람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다리가 하나뿐인 채로 태어난 사람에게 두 다리가 멀쩡하게 태어난 사람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과 다름 없다.
가난한 사람이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은 시스템 때문에 노력을 그만 둔 사람들이다. 그들이 태어난 다리 하나짜리 불구 시스템, 그들에게 비상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은, 아니 제공할 수 없는 시스템 두 다리를 가진 사람에게만 최적화된 세상, 돈이나 부모가 전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결국 취직할 곳이 없다 보면 포기란 말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의 70페센트는 결국 중산층으로 도약하지 못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경제적으로 우리 집 아이들 보다 대학에 들어갈 확률이 200 배나 낮다. 그래서 많은 아이가 대학과 취직은 아예 꿈조차 꾸지 않는다. 물질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이런 아이들의 목표는 그저 생존이다.
“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주라 (스캇 솔즈 저서)
마마킴||조회 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