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동기나 성품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비와 해를 통해 비옥한 땅을 주신다. 예수님의 마지막 몇 구절에 말씀하셨듯이 그분의 제자들은 바로 이 원리에서 다른 모든 사람과 구별된다. 보통 우리 인간은 장삿속처럼 자신의 이익을 쫓아 살아간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 훌륭해 보이는 사람을 인정하고 나도 그에게 인정 받으려 한다. 사랑의 관계에서조차 우리는 대부분 타산적이다. 수익이 확실한 데만 투자한다. 반드시 나도 사랑 받고 위신이 서겠다는 확신이 있어야 사랑을 베푼다. 살다가 사랑에 보답하지 않거나 내 바람대로 인정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5 장 46-47 절의 반어적 물음의 배후에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사랑의 삶이 눈에 뜨게 다르고 특이하고 비범해서 일반 사회와는 구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라는 말씀에 있다. 바로 이것이 마태복음 5 장 20 절에서 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다. 완전히 새로운 생활 방식인 이 사람의 기초는 명예와 자존심과 힘이 아니라, 존중과 은혜와 겸손과 용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는 단순한 문구가 폭탄처럼 터져 인류는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이 말씀은 경찰력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은 반전주의를 뜻하는가? 물론 극도로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전쟁이 허용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 질문은 이것이 대인 관계에서 어떻데 나타나느냐는 것이다. 가장 평범한 기독교적 접근과 그에 따른 변화 가능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탐 스키너는 뉴욕의 길거리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흑인 전도자였다. 회심한 뒤 그는 회고록 ‘해방된 흑인’(Black and Free)에 이렇게 썼다. “고린도 후서 5 장 17 절은 진리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나는 죽었거나 감옥에 갔거나 더 심한 폭력으로 치달았을 것이다…..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 그분 덕분에 내 삶에 새로운 의미와 목적이 생겼다. 성령의 엄청난 역사로 말미암아 변화하게 된 내 삶이 곧 내게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분은 내 삶에서 편견과 증오와 폭력을 거두어 가셨다.
회심하고 몇 주 후에 있었던 한 사건을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새로 눈뜬 지 몇 주 후 풋볼 경기에서 그 사람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팀에서 내 포지션은 공격수인 랲트가드였다. 하프백이 공을 잡고 앤드런이나 오프태클을 시도할 때 삼대 수비수를 방해하는 게 내 임무였다. 그날도 퀴터백이 앤드린을 주문하자 나는 달려 나가서 디펜시브엔드를 막아 쓰러뜨렸다. 하프빽은 돌파해서 득점에 성공했다.
다시 결집하려고 다들 바닥에서 일어서고 있는데….어쩌다 나한테 저지당한 아이가 벌떡 일어나 노발대발해서는 내게 달려들어 복부를 가격했다. 그의 가격으로 내 몸이 앞으로 푹 꺾이자 이번에는 등을 찍어 눌렀다. 그는 땅을 치고 있는 나를 발로 걷어차면서 “이 더러운 껌둥이 xxx내가 한 수 가르쳐 주지”라고 외쳤다.
옛날의 탐 스키너였다면 이럴 때 득달같이 일어나 그 백인 아이를 가루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된 나는 바닥에서 일어서서……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쨌거나 널 사랑한다. 이게 다 예수님 덕분이야.”….
그 아이는 핼맷을 벗어 바닥에 던지고 경기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물론 남은 경기 시간에 출전할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리커품에서 그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탐, 나를 사랑한다는 네 말이 내 편견을 무너뜨렸다. 네가 내 턱주가리를 날렸다면 이렇게 않았겠지.
여기에 중요하게 지적할 점이 있다. 스키너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깊이 내면화했고 동시에 사회 비평가가 되어 교회 안팎에서 인종차별을 비판하고 인종 정의를 열렬히 옹호했다. 용서하는 사랑이 정의의 추구와 대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옳았다.
하나님의 용서는 자신감과 겸손이라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데.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는 한편으로 한없이 높아지면서 또한 하나님을 향한 정의심에 젖어 한없이 낮아진다.
“우리를 사랑하는 않는 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처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다는 뜻이다.(용서를 배우다, 팀 켈러 저서)”
마마킴||조회 1,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