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1907 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공유합니다”
1. 평양대부흥의 기원
20세기에 들어 한국교회에는 3번의 놀라운 부흥운동이 있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이다. 세 번의 부흥운동의 파장 중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은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이 있기 전 그 시발점이 되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지역 주재 선교사들이 모여 가진 기도회 동안에 발흥한 원산부흥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의 영적각성의 모체였다. 초기 부흥운동의 모든 자료들은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산부흥운동으로 귀결된다는 일치된 견해를 피력하였다.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했던 기도회는 두 명의 무명 여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중국의화단 사건으로 원산으로 피신해 온 여선교사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캐나다 장로교 출신 여선교사 맥컬리(Louise Hoard McCully)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회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다른 선교사들도 하나 둘씩 기도회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차제에 공개적으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의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3번의 강의를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하디는 강의를 준비하다 말씀과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명문 토론토대학, 그것도 그 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입국한 하디는 그 내면에 학력에 대한 교만함,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만함, 영국시민이라는 백인우월주의,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이미 기도회 시작하기 전부터 말씀을 통해 은혜를 경험한 하디는 기도회를 인도하는 동안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통회했다. 하디 자신이 고백했듯이 그것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그는 자신의 죄악과 잘못을 토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디의 고백은 동료 선교사들의 회개로 이어졌다. 그 다음 주일 창전감리교회 예배 때 하디는 자신이 맡고 있는 회중들 앞에서 또 다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신의 교만과 성령충만하지 못함과 한국인들에 대한 인종편견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디의 고백은 한국인들의 회개운동으로 이어져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이후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선교사사경회가 개최되었다. 강사는 원산부흥운동의 주역 하디였다. 요한 1서를 본문으로 한 하디의 일련의 메시지는 그곳에 참석한 많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하디는 은혜를 받기 전 얼마나 자신이 교만했는지, 그런 자신에게 어떻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을 변화시켜 주셨는지를 진솔하게 회중들에게 전해주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 목사 이길함 선교사부터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의 손을 잡고 그 집회에 참석했던 12살의 어린 셔우드 홀(Sherwood Hall)에 이르기까지 온 회중들은 하디의 설교를 통해 큰 은혜를 경험했다.
이 날 하디는 이렇게 외쳤다.
"인간이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잘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심과 믿음의 부족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체력이 날마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유지되는 것 같이 우리의 영적인 강건함도 날마다 기도를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의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 질 것입니다."
하디의 메시지는 어린 셔우드 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었다. 본래 서양에 가서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하디의 설교를 듣고 자신 역시 부모님들처럼 의료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서 사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에 최초의 결핵 요양원을 설립하여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건졌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실도 그가 처음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웨일즈와 인도 부흥운동의 현장을 목도하고 한국을 방문한 존스톤에 의해 서울선교사사경회에서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존스톤은 웨일즈의 부흥이 통성기도에 있었다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그 후 통성기도는 한국에 뿌리를 내려 한국교회의 기도로 정착되었다.
게다가 1906년 10월 남장로교 선교구인 목포에서 발흥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이 땅에 부흥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신호로 인식되었다. 프레스톤이 맡고 있는 목포 선교구에서 하디와 쌍벽을 이루는 부흥사 저다인을 초청해 열린 부흥집회에서 강력한 부흥이 임했다. 마치 외과 의사가 메스를 들고 암세포를 도려내는 것처럼 성령께서 그곳에 참석한 회중들 심령 깊숙이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도려내신 후 치유의 향유가 각 심령 위에 부어졌던 것이다. 이어 목포 전역에서 놀라운 통회와 죄 용서가 이어졌다.
평양지역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목포에서 일어난 소식을 듣고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열리는 평안남도 도사경회 동안에도 이 같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저녁마다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2. 한국의 오순절, 평양대부흥운동의 발흥
이런 영적 분위기 속에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안남도 전역에서 올라온 1,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열렸다. 기도로 시작된 사경회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길선주와 모든 선교사들은 14일 정오기도회에 모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다. 그날 헌트가 말씀을 전한 후 이길함이 나와 통성기도를 요청하자 청중들이 기도를 드렸다. 통성기도는 전날과 완연히 달랐다. 통성기도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다 돌려보내고 600명이 남아 새벽 2시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받는 평양대부흥운동은 바로 그 때 모인 남은 자 600명 가운데 임했다.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모인 이들 모두가 처음 체험하는 강력한 부흥이었다.
“한국교회에 1907 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공유합니다”
마마킴||조회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