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국에 선교사님이 들어와서 복음을 전해주고 발전하는 새 문명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세계 후진국가에 속해 있을 것입니다.
~~1885 년 4 월 5일 부활절,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님 아펜셀러 부부와 언더우드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당시 알렌 의료 선교사가 운영하는 광헤원에서 과학 교사로 잠깐 일하다가 1886년 1 월에 ‘예수학당’을 설립하였다. 예수학당은 처음 무명으로 받은 100 닥러의 헌금을 가지고 지금의 아현동에 있는 헌 집을 수리하여 시작했는데,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해 주면서 한글도 가르치고, 성경도 가르쳤다. 이로써 당시 길거리를 해 매던 남자 거지 아이들 스물 다섯 명이 예수 학당에 들어갔다.
그 중에 ‘번개비’라는 유별난 아이가 있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중한 병에 걸려 길거리에서 쓰러져 있는 아이를 우연히 발견하여 광혜원에 입원시켰는데, 그 아이가 번개비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갈 곳이 없는 이 고아를 여섯 살 때 예수학당에 입학시켰다. 이 번개비가 바로 한국 근대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초대 부통령 김규식박사였다. 1918 년 제 1 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김규식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의해 열린 파기 강화 회의에 망명정부의 대표로 참가하여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일본의 악랄한 식민 정치를 비판하며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 것은 유명하다.
번개비는 눈치도 빠르고 영어도 잘 익혔고 언더우드 선교사가 일을 시키기 전에 모든 일을 알아서 착착 해 놓아 선교사의 부인 호튼 여사에게 듬뿍 사랑을 받았다. 호튼 부인이 출산을 위해 미국에 머무는 동안 번개비도 1897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했다.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노크 대학에서 6 년간 줄 곳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졸업 시 평균 92 점으로 졸업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상과 믿음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의 교회와 민족운동에 헌신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예수학당을 통하여 많이 배출되었다. 봉사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한 안창호도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상경하여 길거리를 헤매다가 예수학당에 입학했다 또 민족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감성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정재용 전도사도 예수학당 출신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그 부인인 호튼 여사의 눈물의 기도,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이 인재들이 배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예수학당이 바로 1915년 종로 2 가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이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서울 인구는 약 14 만명이었고, 성문 밖에 살고 있는 인구는 12 만 명 이었다. 궁궐과 양반집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초가뿐이었으며, 여름철만 되면 한양 거리는 산더미처럼 싸인 쓰레기에서 나는 악취와 인분 냄새가 코를 찔러 걸어 자나기가 힘들었다. 빈대, 벼룩, 모기까지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의 의식규모를 새롭게 바꾼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의 희생에 의해 우리의 오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전한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복음의 빛을 갚아야 한다. 지금도 세계에는 약 8 억이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고 하루에 약 4 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 세계 인구의 4 분지 1 이 하루 1 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다. ~~
(네가 가라, 내 양을 먹이라 ~~전 경제차관 대기업 CEO 타이거 박’이라 불렸던 박윤서 창로저서, 필리핀 오지 망암족 마을에서 그들을 섬기면서 우리 나라를 이렇게 개발시킨 선교사님을 기억하는 글이다)
“복음으로 우리 조국의 역사를 바꾼 선교사님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마마킴||조회 1,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