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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진복교회 조인숙사모간증 (2)”

마마킴||조회 1,672
“나주진복교회 조인숙사모간증 (2)”
저는 서울 태생이고 목사님은 충청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던 저희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생면부지인 전라도 나주 임씨 140년 된 한옥집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침 주인 되시는 분들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남원으로 잠시 이사를 가신 곳이라 저희에게 처소를 맡겨 관리하게 하셨고 그분들은 지금의 저희 교회 안수집사님들로 계십니다.
서울에서 풀 한 포기 벼 한 포기 보지 못하고 자란 저는 마당에 풀을 보고 잔디 같다고 좋아했고 민들레를 고돌배기로 착각하여 그 해 봄 내내 목사님께 반찬으로 공급하는 일도 했답니다. 그러나 그것도 감사하는 것은 그 민들렉가 늘 입 병을 갖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사님에게 치료약이 되어 병을 고치는 계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곳 사람들이 송편 만들 때 쓰는 모시 잎도 깻잎으로 잘못 알고, 온갖 풀들을 반찬으로 제공 했고 아무것도 모르고 부인이 주는 음식을 드셨지만 그 모든 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밑거름이 된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약이었습니다.
처음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이 없는 분이 돌아 가셨는데 며칠 후에 발견되어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그 때만해도 나라 복지도 없고 누구 하나 그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아 오구라 들어 구부러져 있는 시신을 하나 하나 펴가며 입관을 하는 일도 목사님은 서슴없이 하셨고 그 모습을 본 동네 주민들은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농촌에서 자랐으면 겁을 냈을지 모르는 일들을 겁 없이 철없이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돼지 새끼를 키워 보겠다고 4 마리를 사와서 먹이고 날마다 씻기고 하여 키웠는데 점점 불어나며 커지는 돼지를 감당 할 수가 없어서 동네 주민 잔치에 보내드리고 전 주인이 두고 간 몇마리 오골 계 닭을 병아리 부화를 시켜 100 마리가 될 정도가 되자 동네 주민들에게 몇 마리씩 나누어 드리기도 하고 로마서 12 장 12절의 말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목사님들을 대접하는 일들도 여러 번 하여 나주가면 오골계 먹는다는 교단 목사님들의 우스개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낯선 이곳에서 전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동네 주민들은 서울 아낙네가 철없이 날뛰다가 몇 달 못 있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곳 사투리에 말조차 알아듣지 못했기에 의사소통이 어려웠습니다. 동네만 나가면 어른들께서, “터 팔아, 터 팔아”했는데 저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그곳에 땅 한 평도 없는데 뭘 저렇게 팔라고 하나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은 둘째 아기 가지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곳은 억양이 좀 센 편이라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말이 제에겐 싸우는 것처럼 들려서 다가서기에 서툴렀지만 지금은 저도 그 억양으로 살아간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으로 1,2년 지난 후에 10 여명의 성도들이 모였고 마냥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기엔 예배 처소가 부족했기에 그곳에서 2 년을 지난 후 성전 터전을 마련하여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목사님은 여러 가지 재주를 겸비 하셨습니다. 농촌목회를 자원한 목사님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 장 10 절의 말씀을 따라 성도들에게도 가르치고 본인도 모든 것을 자급자족의 삶으로 오늘 까지 오셨고 성전 건축과 교회의 필요한 성구, 가정의 모든 가구를 재료를 사다가 만들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 주신 지혜와 재능으로 그때마다 적절하게  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주변 에 성전을 짓거나 교회 부속 건물을 짓는 일들도 청년들을 데리고 가서 도와 드리고 선교 비는 못 드리지만 몸으로 선교하는 일에 적극적이였습니다.
서예와 동양화를 하는 아내 사모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도 고가의 표구비가 많이 들어 선물하지 못하고 재능을 썩히는 것을 맘 아파하시다 손수 한 달에 걸쳐 독학하여 표구와 액자를 만들어 주어서 그때부터 성도들의 대소사나 집들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정성을 담아 쓰고 그 가정에 선물로 주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목사님의 철두철미한 절약 정신과 손 재능은 중고품을 재활용하는데 가능하셨고 이를 본 주민과 지인들이 버릴 물건들도 저희이게 주시면 작품을 만들어 다시 새 것을 만들었기에 저의 가정에 사용하는 가구와 가전제품들은 90%가 10 년 이상 된 골동품들입니다. 농촌교회 재정 형편을 늘 고려하며 검소하게 헌금을 사용하며 주변의 나무토막 하나도 버리지 않고 화목으로 사용하시니 동네 주민들이 화목을 가져다 주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늘 저에게 말씀하시길 목회자는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와 성도의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고 저 또한 그런 삶에 불만이 없으니 “딤전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말씀대로 자족하는 비결을 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30 대 초반의 목사님은 1989년 2 월부터 당시는 성도가 아니지만 지금은 안수집사가 되신 분과 영산강 강변에서 모래와 자갈을 경운기로 운반하고 벽돌 찍는 손기계를 구입하며 몇 달에 걸쳐 직접 벽돌을 찍고 혼자서 지금은 사택으로 쓰고 있는 첫 예배당을 1 년에 걸쳐 새벽 예배 5 시 이후부터 밤 10시까지 혼자 건축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팔을 들 수가 없어 밥상에서 수저를 들수 없을 정도로 힘든 과정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고 건축하는 목사님을 젊은 사람 하나 죽이겠다고 하여 하나 둘씩 동참하여 첫 예배당을 짓고 그 뒤로 그분들도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성도가 되었습니다.
당시 재정 10 만원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 하였으나 이 일에 여호와 이레와 기적이 늘 함께 하셨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목사님은 시골 성도의 형편을 잘 아시기에 헌금을 강요하지 않았고 또한 어떤 곳에도 선교를 부탁하지 않았고 그 때부터 부담을 가질까 싶어 지인들과도 연락을 잘 하지 않고 오직 묵묵히 기도하며 몸으로 성전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 때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알지도 못하는 분들과 동네 분들이 함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