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읽은 맘짱, 손짱, 영짱이야기”
장애를 딛고 인생을 기쁨 공식으로 풀어낸 김인강교수님을 그렇게 만드는데 기역한 맘짱, 손짱, 영짱인 선생님 이야기는 참 대단했습니다. 김교수님은 “두다리로 서본 기억이 나는 없다. 두살 때 소아마비를 알았고 소위 말하는 앉은 뱅이가 되었다. 비료부대 위에 엎드려 한손으로는 땅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대를 잡아끌며 흙바닥 위를 다니는 나를 보고 사람들을 혀를 찼다. 그들은 내가 거지가 될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혹은 달랐다. 이성의 꿈인 수학, 그증 우싱수학을 전공한 수학자가 만난 하나님”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카이스트, 서울대 교수를 거쳐 핸재는 고등과학원 교수로 있고 2007 년에는 40 세 이하의 우수한 과학자에게 주는 젊은 과학자 상을 받았는데 어렸을 때 이런 길로 인도하신분의 이야기가 “기쁨 공식”책에 실려 있어서 공유합니다.
~~최화복 선생님을 재활원에서 만난 건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었다. 선생님은 장애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일반 학교에서 재활원학교로 스스로 옮겨오신 분이었다. 깔끔하게 항상 단정한 차림의 선생님은 내가 6 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나는 4 학년 때 6 학년으로 훨반했다. 선생님의 추천이었다.
“야, 선생님 눈썹 곤두섰어. 조심해.”
우리가 예의가 없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선생님은 무섭게 혼내셨다. 장애인이라고 봐주시는 것이 없었다. 엄격했지만 절대로 때리지는 않으셨다. 수업 내용을 못 알아 들으면 열번이라고 처음하듯 다시 설명해 주셨다.
“자 긴장을 풀고 입을 크게 벌리고.” 선생님은 직접 오르간을 연주하며, 우리에게 노래를 지도하셨다. 장애로 말이 어눌한 아이들도 노래를 하면 잘 따라 불렀다. 합주부도 지도하셨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우리 합주부는 삼육재활원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나가 1 등을 했다. 선생님께 베운 서예 솜씨로 나는 붓글쌔 대회에 나가 국무충리 상을 탔다.
선생님은 공립학교에 게실 때부터 유명한 교사였다. 그분 밑에서 공부를 하면 좋은 상급학교에 갈수 있다는 소문이 나서 과외 지도를 받기 위해 순번대기표를 뽑고 기다려야 할 정도로 실력 있는 분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입시지도만 하는 일반학교보다는 전인고육이 가능한 재활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더 자랑스럽고 행복하다고 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한 가지는 잘하는 게 있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네가 물 잘하는지 그걸 한번 찾아보자.” 앞날에 대한 아무 소망이 없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꿈을 심어주셨다. 선생님은 내게 공부를 잘 할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 하셨다.
“인강아, 너는 일반 중학교로 진학해서 끝까지 공부해야 한다.” 선생님은 일반학교에서 보는 중간고사, 학기말고사 문제지를 가져다가 내게 풀게 하셨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누나는 나에게 재활원에 계속 있으면서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공부를 해도 취업이 어려울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화복선생님은 끝까지 누나를 설득하셨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거예요. 인강이는 공부 길로 가야 합니다.” 선생님은 나를 대전 중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선생님은 월평동 재활원에서 대흥동 대전중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여러차래 찾아가 호소하셨지만 학교 측은 냉담했다. 선생님은 우리 자취 방이 학교와 가까워 통학에 아무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약도까지 그려서 제출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학교에 계단이 많아서 이런 학생은 받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나중에 교장 선생님을 만나 협박까지 하셨다고 한다. “이 학생 안받으면 후회하실 겁니다. 예가 나중에 대전 중학교 이름을 날릴 테니까 두고 보세요.” 그 협박이 통했나보다. 나는 대전 중학교에 입학했다.훌륭한 교사가 한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일을 행했는지 선생님은 알고나 계실까?
심몇 년이 흐른 뒤 카이스트 교수가 되어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백발을 날리며 여전히 재활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선생님은 나의 인생 여정을 소문으로 듣고 알고 계셨다. 내가 대학교수가 된 것을 당신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선생님의 부탁으로 나는 재활원의 어린 친구들 앞에 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섣부른 위로도, 값싼 충고도 필요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혼할 때 선생님은 내 친구 전화와 함께 창원까지 축하해주러 오셨다. 아이를 낳자 나는 선생님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드렸다. 선생님은 흔쾌히 두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주셨다. 무슨 꿈을 꿔야 할지, 아니 꿈을 꿀수나 있는지 확신조차 없었던 소아마비 소년을 일으키고 길을 열어주신 최화복 선생님, 내가 가장 존경하는 최고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