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절을 맞이하여 더욱 기도합시다”
3.1 절 101 년을 맞이하는 오늘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예배를 못드리는 기가막힌 역사앞에 당시에 우리나라를 변화시키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정말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섰던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게 됩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에 지금 코로나 보다 더 무서웠던 결핵 환자들을 살리고 이 나라의 역사를 바꾸었던 선교사님들 중에 닥터홀 가족을 기억하며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홀리네이션스 홈페이지 앞에 올린 사진은 닥터홀 가족이 묻혀있는 양화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바로 이런분들을 본받자고 외국인 학생들과 같이 양화진을 방문하여 그 묘지앞에서 사진을 찍어서 올렸습니다.
~~닥터 홀의 조선회상, 고려대학교는 기독교학교도
아닌데 의대 출신 선교사 중에 참 특별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때 참 인상적인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려대학교는 로제타 홀 선교사의 정신을 따라 세워진 학교입니다.
로제타 홀은 1890년 남편
제임스 홀과 함께 파송된 여성 의료 선교사입니다. 청일 전쟁 당시 다친 조선 군인들을 치료하다 남편선교사는
격무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순교합니다. 그때 로제타 홀의 나이는 34세였고
결혼한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남편과 사별한
로제타 홀은 잠시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2년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40년간 한국인들을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녀는 화상을 입은 젊은 조선 여성을 위해 자신의
피부를 이식해 준 사람입니다. 그녀가 세운 학교와 의학 강습소가 지금의 이대 동대문병원과 고대 의대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조선 땅에서 낳은 아이는, 이
땅에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닥터 셔우도 홀과 며느리 메리안 홀 역시
조선 땅에서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셔우드 홀은 우리나라 최초로 결핵전문병원과 결핵 요양원을 세운 사람이고,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크리스마스실’을 만들어 결핵 환자들을 위한 기금을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1932년 일본사람들이 지배하던 땅에서 일본 사람들을 설득해 ‘남대문’ 그림을 도안해 크리스마스실을
만든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양화진에 가면 홀
일가 묘소에 다섯 개의 무덤이 있습니다. 로제타 홀 부부, 셔우드
홀 부부, 그리고 셔우드의 여동생까지 말입니다. 홀 일가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Whether we live or die, we are the Lord’s." 죽어도 살아도 주의 것이로다!!
당시의 조선은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주변
열강국의 개방요구와 이해관계에 따른 힘이 혼재되어 있었고,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청일 전쟁, 민비시해 사건, 노일
전쟁, 등 엄청난 격변기의 소용돌이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폐결핵, 이질 등 질병에 노출되어 있었고, 각국의
여러 선교사들은 소명의식으로 황무지 같은 조선 땅에 예수님의 사랑을 심는 것을 보았습니다.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선교기간 : 1891~1894)과 어머니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선교기간 : 1890~1894)은 조선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고 의사가 되어 청년의 모습으로 조선에 왔습니다.. 젊은 의사부부가 지금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통 전국이 뒤흔들리고 있을때도 다들 무서워도 벌벌 떠는데 이렇게 가난과 전염병에 아프리카만도 못했던 조선에 와서 일생을 보내는 결단을 할수 있었을까요?
화상을 입은 환자를 치유하기 위하여 자기 피부를 떼어내어 이식 수술을 하기도 하고 환자가 있으면 늦은 밤이라도, 먼 곳이라도 자기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달려갔습니다. 지금과 같이 자동차가 없는 길을 걸어서 다니는 수고는 우리가 상상할수도 없는 일입니다.
재임스 홀은 평양지역의 최초의 선교개척 책임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초창기에 평양지역을 선교하는 도중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평야감사가 신앙을 가진 3명의 청년을 평양 감방에 잡아가서 사형을 집행하려는 급박한 상황에 빠졌는데 재임스 홀은 서울에 있는 외교 채널로 긴급히 호소하여 이들을 석방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잡혀온 청년 중에 김 창식 이라는 청년은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아 (석방되어도 예수님을 전도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아니함) 더욱 많은 매를 맞고 거의 실신되어 석방되었습니다. 그가 나중에는 조선 최초의 목사가 되는 결실을 보게 됩니다.
재임스 홀은 당시의 청일 전쟁으로 많은 환자가 발생하여 그들을 치유하는 과정 중 병이 나서 한국에 온지 3년 만에 1984년도에 젊은 나이에 소천 하였고 조선선교의 꿈은 안고 온 젊은 두 부부는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고 혼자 남은 아내는 그 슬픔이 얼마나 컷 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남편을 천국으로 보내고 다시 둘째 아이 에스더가 10살 때 폐결핵으로 하늘나라 갈 때는 아내 로제타 셔우드 홀의 마음은 더욱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의 신앙은 고난가운데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으로 사명으로 이 조선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 에게 그러한 힘을 준 것은 아들 셔우드 홀과 먼저 양화진에 잠자고 있는 남편과 딸을 생각하며 이 땅을 떠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는 사명을 가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녀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장애우를 특별히 사랑하여 평양에 맹인학교를 최초로 설립하고 뉴욕 점자법을 한국 점자법으로 만들어 내었고 의료선교(평양 기홀병원 설립)를 하면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어린 아들 셔우드 홀(선교기간 : 1926~1941)을 한국에서 엄격하게 훈련 시키며 또한 의료 선교사로 준비할 수 있게 미국에서 공부시키고 대를 이어 선교 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아들 셔우드 홀도 의사가 되고 아내 메리안 버텀리도 의사가 되어 부모님의 대를 이어 조선선교의 사명을 감당을 하였습니다. 해주에 최초로 결핵요양원을 지어 환자들을 치료하고, 많은 의료사업을 펼치고 것을 봅니다. 셔우드 홀 가족(본인, 부모님, 형제, 아내 등)이 지금 양화진에 잠들어 있습니다. ~~~
3.1 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진실한 회개와 기도로 속히 조국을 살릴수 있기를 기도하는 우리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