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요즈음 남편의 돕는자의 역할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남편을 세워주고 용기를 주고 하는 아내는 거의 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일생동안 가족을 위해 일을 하다가 퇴직하고 나면 밥하기 힘든데 세끼 먹는다고 “삼식이”라는 말도 생기고 남편의 명칭을 “그 인간”이라고 부르는 걱정스런 이 시대에 너무나 믿음의 본을 보여준 목사님의 간증이라 나누고 싶습니다. 휴대폰 앞에 “60 세 청년 000” 라고 올린 사진이 하도 인상 깊어서 웃으면서 여러분들에게 보라고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정송자 사모님의 간증 이야기(1)
여호수아서
100독 도전 !!!
11월 어느 토요일, 항상
성경읽기와 묵상을 강조하는 권사님이 성경공부 시간에 "승리의 비결을 알고 싶으면 여호수아서를 100번 읽으세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순간 그 음성이 내 가슴속으로 쏙 들어왔습니다. 마침 농사 짓는
땅 문제로 어수선하던 터였는데, 가나안을 착착 점령해 나가는 여호수아와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거였습니다. 그래, 여호수아서를 100독 하자! 하루에 1독씩...100독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 우리에게 필요한 땅을 주시도록 기도하자. 지금이 11월이니까 100일이면 2월
하순 정도..그때까지 여호수아서에 집중하자라는 마음으로 여호수아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풍랑이 불어오다
11월말쯤 부산에 있는 작은 언니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연락이 왔습니다, 건강검진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는..듣는 순간, 나는 놀라거나 당황스럽기보다는 멍해졌습니다. 아.. 이건 뭐지? 나는 지금 여호수아서와 씨름하고 있는데.. 이건 무슨 바람이지..? 그때로부터 나는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좋은 곳에 가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에도 앞에서는 함께 웃지만 동시에 남들이 알아
채지 못하는 눈물을 줄줄 흘릴 때가 많았습니다.
작은 언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를 무척 예뻐 했다고 어머니께서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두 살 터울이지만, 나는 언니를 부모님보다 더 의지하고 산 적이 많았던 듯합니다. 지금껏 나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누구보다도 좋은 친구로 지금까지
지내 왔습니다. 그런데 중병이라니.. 언니가 없으면 어떻게
살지..? 작은 언니의 발병과 더불어 그동안 작은 언니랑 둘이서 돌보고 있던 이미 장애가 있는 큰 언니도
넘어가야할 큰 산으로 다가왔습니다. 가까이 있던 작은 언니가 더 많은 수고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어 큰 언니를 어딘가 시설로 보내야만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언니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도 투병기간 동안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일산에서
부산으로 먼길을 오가면서 빠른 시간내에 이 모든 일을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 진행되는
일상생활 스케쥴도 마무리 해야했고.. 이 무거운 현실 앞에 나는 여호수아서 100독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망연자실한 채 그냥 하나님만 찾았습니다.
하나님! 한 사람은 장애인, 또 한 사람은 암
환자인데 절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언니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풍랑은 더 빨리 목적지로 인도했습니다. 내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큰 언니는 장기요양 등급을
받지 못한 상태라 요양원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앞서 가셔서 진단하는 의사 선생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일사천리로 2주 만에 요양원에 입소할 수 있었습니다.
12월 24일.. 그렇게 큰 언니는 요양원으로
가고, 작은 언니는 일산 국립 암센타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작은 언니랑은 이땅에서 80세까지는 같이 살게 해 주세요. 그리고 믿음의 교제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용인 샘물 호스피스병원
직전 직장을 퇴직하고, 12월부터 근무하기로 되어 있던 샘물 호스피스병원에서는 나의
형편을 양해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출근을 미룰 수는 없어
1월 초부터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당면한 문제들은 아버지께 부탁드리고 나는 또 나의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요. 샘물 호스피스병원의
인생 2막을 위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간은 나와 가족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말기 임종환자를 돌보겠노라고 마음 먹고 오랫동안 그에 필요한 준비들을 해 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잘 살았건, 잘 살아 내지 못했건 간에 한 사람의 마지막 시간은 소중하게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가족과 지인들의 사랑과 눈물속에 천국으로 떠나는 자들의 죽음보다는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이 세상의 삶을 마무리하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알아 주지 않는 자들의 이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를 생각하며 나는 그들의 든든한 마지막
지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3일은 용인에서, 3일은 일산에서의 생활이 시작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