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카메룬에서 온 레이첼”
우리 선교회 학생중에서 처음 아프리카출신은, 카메룬에서 온 레이첼이 장학생으로 뽑혔습니다. 이번 신학기부터 공부를 시작할 레이첼은 이제 아프리카에도 우리 선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며 고아들을 돌볼수 있는 새로운 지경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주님을 닮은 역할이 역사를 바꾸는 것을 생각하며 기대에 부픈 마음입니다.
레이첼은 선교회 장학생 44 번째 학생이 되었습니다. 한명의 새로운 학생이 들어올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 그리도 특별하게 우리에게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키우는 일을 맡겨주시는것에 감사 감사드릴뿐입니다.
아프리카 지역을 생각하면 제일먼저 슈바이처 박사가 생각나서 슈바이처 박사님의 삶을 나누고 싶습니다.
“슈바이처 박사~~ 퍼온글”
나는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오늘의 나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분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간 슈바이처 박사는 독일이 낳은 훌륭한 수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학자로서 대학교수가 되었고, 전통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어려서부터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해 인정받는 연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파이프오르간 제작에도 일가견의 전문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치에 있으면서도 항상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 빈 공간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는 서른 살이 되면서 사생활을 등지고 공생활에 투신해 새로운 삶을 성취했는데, 자기도 30 고개를 넘기면서부터는 지금 이루어 놓은 것보다 더 소중한 사명을 찾아 나설수 없을까 하는 소원이었다.
그러던 중에 슈바이처는 우연한 기회에 한 잡지에 실린 기사를 읽었다. 아프리카에는 선교사들이 있어 기독교 복음은 전파되고 있으나 의사가 없어 도움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환자들이 많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슈바이처는 바로 그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사명이라고 받아들였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의과대학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그 대학에는 교수와 학생의 신분을 동시에 갖는 규정이 없었고, 슈바이처는 교수직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전체 교수회의에서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 덕분에 슈바이처는 낮에는 교수직을 계속하면서 야간에 의과대학 수업을 받는 특권을 받았다. (이글을 읽기 전에는 슈바이처는 처음부터 의사였기에 아프리카에 헌신을 한줄 알았습니다.)
의사 자격을 취득할 때까지 슈바이처의 노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되었다. 자신도 특별한 건강을 타고났기에 가능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의사 자격을 얻은 후에는 열대의학에 관한 분야까지 추가로 공부해야 했다. 그 자신은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몇해 동안 자신을 잊고 강의와 의학 공부에 열중했고 그 모든 일을 끝냈을 때는 감격의 눈물을 훌렸다”고 강철 같은 의지의 사나이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로 갈 준비에 착수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기를 사랑하고 위해주는 사람들의 만류였다. “아프리카에 의사로 갈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경제적 뒷받침만 되면 의사 여러 명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문명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이다. 사회적 손실을 막기 휘해서다록 독일과 유럽에 머물라” 는 충고였다.
또 한가지 뒤따르는 문제는 경제적 후원이었다. 그가 아프리카로 간다고 해서 재정적 후원을 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사재를 정리하고 간호자로 일할수 있는 부인과 같이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프리카에 정착하는 그는 무로부터 유를 장풀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자기 손과 아이디어로 진행했다. 작은 병원이 생기고 환자들이 찾아들기 시작 했을 때부터는 학문과 음악의 뜻을 버릴 수가 없었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학문 연구와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오르간이나 피아노를 갖고 올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널빤지에 오르간 건반을 그렇놓고 한두 시간씩은 연주 연습에 시간을 바치곤 했다.
그 결과로 두세 권의 저서가 발간 되었다. 유럽에 잠시 갔을때는 그가 다시 아프리카로 가면 더 훌륭한 연주를 들을 수 없을것이라는 음약 분야의 협의를 통해 연주 녹음을 남기기도 했다. 나도 피아노를 전공하던 친구를 통해 그의 바흐 연주를 들은 경험이 있다.
그가 남겨준 철학적 저서는 윤리에 관한 것이었다. 모든 윤리와 도덕의 기반과 목표가 되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라는 결론이었다. 그것은 논리적 추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아프리카 밀림의 강 위를 뗏목을 타고 지나다가 얻은 계시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래서 슈바이처의 후계자들은 생명 강의를 위한 모임을 같고 의료사업에 헌신 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모임이 오래 지솟되었다.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오슬로에 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맞이해 주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자들이 상금을 무엇에 쓰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운영하고 있는 병원에는 나병 환자를 위한 병동이 없는데 이번에 그 병동을 신축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90 세가 될 때 까지 그 병원에서 봉사했다. 슈바이처를 돕고 있던 후배 의사들이 이제는 좀 쉬시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꾸준히 환자들을 돌보면서 “ 왜 나의 책임까지 빼앗으려고 하느냐?”고 농담 썩인 불만을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