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주님의 사랑으로 전도한 조국을 변화시켰던 선교사님의 모델을 보세요~닥터에비슨과 사무엘무어선교사님의 모델”
한 사람의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500 년 역사에 백정을 사람 취급도 않한 것을 깨트리고 그런 가운데서 백정의 아들을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의사를 만드는 것을 보면서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양반이 백정 때문에 교회에 출석을 못하겠다고 항거할 때 양반편을 들지않고 백정을 동등하게 주님 말씀대로 사랑할수 있는 참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현대에도 이렇게 한다면 교회는 전도가 안될 이유가 없을것입니다.
1894년 어느 날 백정 박가(朴歌)가 열병(발진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였다. 열은 열로 고친다고, 더운 방에서 몸을 지지며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고 있을때 아들이 이상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아들만은 백정신세에서 면해주려고 곤당골예수교학당에 보냈다. 당시, 1892년에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선교사 사무엘 무어(모삼열)가 1893년 6월 곤당골교회를 개척하고, 교회 안에 학당을 세우고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들이 함께 데리고 온 이 사람이 닥터 에비슨이었다. 무어 선교사와
닥터 에비슨은 박가가 완쾌될 때까지 왕진을 계속하며 보살펴 주었다. 그는 임금님의 주치의 닥터 에비슨이
자기 같은 천민을 치료하러 누추한 집에까지 온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경을 헤매던 박가는 닥터
에비슨의 정성어린 치료로 병상에서 일어나 무어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박가는 1894년 무어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곤당골 교회에서는 그에게
성춘(成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승동교회 100년사』에는, 1894년 박성춘이 첫 세례를 받았는데, 백정 박가의 입교는 우리 교회사에 큰 의의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5년 박성춘의 전도로 백정의 입교가 늘어나자 교회 내에서 말썽이 일어났다.
양반 계급의 교인들이 천민 계급의 백정들과 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면서 교회 출석을 거부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무어 목사는 깜짝 놀랐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간곡히 만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약 한 달 뒤 그 중의 한 사람이 찾아와서 만약 자기들을 앞자리에
앉도록 좌석을 구별해 준다면 교회에 출석하겠다고 했으나 무어 목사가 그 제안을 거부하자 그들은 마침내 아주 갈라져 나가서 홍문동(옛날 홍문섯골이라고 불리워오던 홍문동, 지금의 광교 조흥은행 본점
뒷골목 근처였다고 함) 교회를 세웠다. 이때가 1895년 4월 20일이었다. 양반들이 곤당골 교회를 이탈해도 무어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는 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이건만, 인간적 제도의 차별을 내세워 신령한 형제됨을 거부한 양반들을 옳다고
인정할 수도 없고, 잘못했다고 치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까운 인물들을 포기해 버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일이 생겼다. 1898년 6월 17일
돌발적인 화재로 곤당골 교회당이 불에 탔다. 이 화재는 곤당골 교회와 홍문동 교회가 다시 화합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1895년에 갈라져 나갔던 홍문동 교회 교인들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곤당골 교회와 합하여 중앙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그 뒤에 승동교회로 발전했다. 백정 해방 운동은 1898년
교인은 108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백정 출신 교인 수는
30명이었다. 무어 목사는 5백 년간 사람 대접을
못받던 백정들로 하여금 인권을 되찾게 하는 백정 해방 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는 무어 목사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박씨는 전국에 산재한 약 3만 명의 백정들에게 전도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실천하였다. 1895년 10월 13일, 무어 목사는 수원에서 감격적인 체험을 하였다. 수원 주변에 살고 있는 백정들을 모으니 약 50명이 되었다. 박씨는 이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가를 간증한 후, 무어
목사로 하여금 예배를 인도하도록 하였다. 50명이 집에 다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일부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예배를 드렸다. 박성춘은 이제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다. 한
손에는 백정을 해방한다는 포고문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백정들에게 자신을 내어놓았다.
무어 목사의 백정 해방 운동은 성공하여 백정들은 그때에 비로소 국민의 자격을 얻게 되었으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민적에 오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갓도 쓰고 망건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법률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박성춘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서울에서 수원까지 전도 구역을 확대하여
수백 명의 백정들이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박성춘은 1911년 12월에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한편 그의 아들 박서양은 신학문을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받은 행운아가 되었다. 그는 곤당골교회 예수학당을 나온 뒤 1899년 제중원의학교, 즉 오늘의 세브란스의대에 입학하여 1908년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병원을 세우고 조선인 유일의 양의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민족교육기관인 숭신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에 헌신하였다. 또한 3.1운동에 호응해 만주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국민회 산하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로 임명되었다. 박서양 외과의사에게 “종교와 의술을 빛낸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1908년 6월 3일에는 제1회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를 졸업하고, 그 다음날 의술 개업 인허장을 받는다. 1909년 9월에는 콜레라가 나돌자 김필순, 김희영, 안상호, 이석준, 박용남, 장기무, 한경교, 정윤해
등과 함께 방역에 나섰다.
1917년에는 간도로 옮겨 연길에 구세병원을 개업하고, 1919년에는 대한국민회 군의가
되어 대한국민회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최진동이 이끄는 북로독군부 등과 연합정책을 펼친다. 1936년에는 황해도 연안으로 귀국해 병원을 개업해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던 박서양은 1940년 12월 15일
고양군 은평면 수색리 165번지에서 55세란 짧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정부는 2008년 8월 15일, 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