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살아있는 한(1)
주찬미 선교사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요즈음 그 아름다움을 눈으로 볼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으며, 마음에 담을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뒤돌아 보니 중국선교사라는 이름으로 20여년을 달려왔습니다. 선교사 파송 심사를 받을 때 간증문을 써보고, 지금에서야 다시금 간증문을 써 봅니다. 그동안 저의 삶 속에서 행하셨던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하자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저는 먼저, 선교 초창기에 하나님께서 선교사로서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셨던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 다음으로, 얼마 전 겪었던 사건을 통해, 선교사가 감당해야할 십자가에 대해 배웠던 일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저의 짧은 간증이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공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충신
저희 부부는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마태복음 24장 14장 말씀 성취를 위한 작은 도구가 되기를 소망하며, 선교지로 향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종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선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언어 훈련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진행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동쪽으로 가라!”
귀를 통해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 어느 부분 인가로부터 전해오는 음성이었습니다. '그저 드는 마음이겠거니' 생각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똑같은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달 가까이 중국 서남부의 산악 지대를 넘나들었습니다. 온몸을 먼지로 뒤집어쓴 채 겨우 대도시에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중국 쓰촨성 남부에 있는 판즈화라는 도시였습니다. 이제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 일만 남아있었습니다.
“동쪽으로 가라!” 조금 더 생생한 외침이 되어 마음을 진동시켰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상인들, 손님을 기다리느라 길게 늘어선 택시들, 그리고 하늘에 가득한 공업도시의 희뿌연 매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를 향해 이야기하거나 소리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소리 아닌 소리가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잠시 미칠 수 있다고 하더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동쪽을 향해 가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누군가가 동쪽에서 초대하는 것 같기도 한 느낌,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쪽으로 가는 것을 마다해서는 안 될, 일종의 의무감 같기도 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동쪽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낡은 버스는 수없이 산길을 오르고 또 내려갔습니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계단식 밭에는 추수를 마친 옥수수 줄기들이 삐죽이 서있었습니다. 오후의 황금빛 햇빛이 그 위를 덮고 있었습니다. 몇 차례 버스를 갈아탔습니다. 방향은 계속해서 동쪽이었습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늦어, 더 이상 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없었습니다. 그곳은 가난이 물씬 묻어나는 산골의 읍내였습니다. 허름한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 한국 돈으로 1500원짜리 국수를 먹었습니다. 다시금 동쪽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 밖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전날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흙길이 계속되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도대체 내가 왜 이런 길을 가고 있지?’라는 질문과, ‘지금쯤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의 침대 위에서 편하게 쉬고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번갈아 지나갔습니다. 버스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윈난성 동북부의 한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서둘러 숙소를 잡았습니다. 여행의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곧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자, 곧바로 고민이 밀려왔습니다. 계속해서 동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동쪽 행을 중단하고 베이징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 순간, 마음 속에서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동쪽으로 가라!”
그와 동시에 ‘스먼칸’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곳은 사무엘 폴라드 선교사가 사역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이분은,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국 서남부에서는 위대한 중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에 필적할 만한 신앙의 거목으로 인정되는 선교사님이었습니다. 그분의 헌신과 열정, 많은 열매는 이미 제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사역했던 장소인 ‘스먼칸’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습니다. 어렴풋이 윈난성의 오른쪽에 있는 꾸이조우성 서북부의 끝자락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숙소 밖으로 나가 스먼칸까지 가는 교통 편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버스 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개인 승용차를 빌려 타기로 결정했습니다. 가격을 흥정한 후, 차를 타고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몇 시간을 달려, 삼거리가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 정차했습니다. 운전사는 길이 험해서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차를 돌려 떠났습니다. 난감했습니다. 달리 선택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길가를 배회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멀리서 사람을 가득 채운 소형 봉고차 한 대가 다가왔습니다. 차를 세워, 혹시 스먼칸으로 갈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차의 목적지는 스먼칸이었습니다. 그 차에는 오직 하나의 좌석만이 남아있었습니다.
봉고차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산길을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몇 일 동안 왔던 길도 척박해 보였지만, 그 산길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메말라 있었습니다. 주변의 산은 온통 누런 흙과 바위로 가득했고,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잡풀들로 인해서 더욱 황량해 보였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입술이 바삭거리며 말라 왔습니다.
이미 해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 조그맣게 건물이 보였습니다.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었습니다. 차가 굽이굽이 산길을 돌며 천천히 그 건물로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갈수록 붉은 표시가 점점 크게 보였습니다. 십자가였습니다.
4-50평 정도 크기의 예배당이었습니다. 입구에는 '스먼칸기독교복음당'이라는 예배당 이름이 흰 바탕에 붉은 글씨로 새겨져있었습니다. 예배당 안은 소수민족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습니다.
예배당 왼쪽으로 돌아갔습니다. 창고 같은 조그마한 부속 건물이 있었습니다. 왼쪽 벽에 ‘접수처’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빨간색의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이곳에 무슨 행사 같은 것이 열리는가?’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을 들었으나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말은 토속 억양이 섞인 지역 사투리였습니다. 간간이 알아들은 것은, 다음날 그 교회에서 어떤 기념행사가 열릴 것이며, 접수를 하면 숙소를 배정하고 식사를 마련해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행사가 열릴 것이라 이야기한 시간에 예배당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안에는 열댓 명 정도의 사람들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행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규모였습니다.
십여 분 후, 예배당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람들이 줄지어 옆으로 늘어섰습니다. 연이어 또 다른 행렬이 찬송을 부르며 나타났습니다. 행렬 중간중간에는 교회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습니다. 마치 올림픽 선수단이 행진하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각종 물건이 들려있었습니다. 거울, 액자, 사진, 장식물 등 스먼칸 교회에 주는 선물인 듯 보였습니다.
끊임없이 행렬이 이어졌고, 찬송도 계속하여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예배당 옆문으로 들어가서 강대상을 지난 다음 정문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줄지어 사라졌습니다. 계속하여 같은 모습이 반복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행렬의 끝이 보였습니다. 옆에 도열해있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예배당은 이내 텅 비었습니다.
한참 동안, 사람 없는 예배당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이대로 모든 행사가 끝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밖으로 나와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곳에 온 수많은 사람들의 행방에 대해서 말이죠. 그는 말없이 한 비탈길을 가리켰습니다.
그 방향을 따라서 한참을 올라갔습니다. 숨이 가빠왔습니다. 눈앞에 산등성이가 나타났습니다.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갯마루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넓은 개활지에 꽃이 만발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꽃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그 꽃은 식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꽃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자신의 민족 고유 의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붉고, 노랗고 푸른색 무늬로 한껏 아름다움을 드러낸 옷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진 꽃밭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예배는 폴라드 선교사가 스먼칸 교회를 개척한 지 100년이 된 날을 기념하는 예배였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율이 흘렀습니다. 그제야 4일 전, 쓰촨성 판즈화시에서 들었던 ‘동쪽으로 가라’는 음성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꽃과 같은 모습으로 예배드리던 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초청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초청에 의해 100주년 기념 예배가 있을 것임을 미리 알았고, 이 날을 준비했으며, 참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몇일 전, 전혀 다른 지역에 있었습니다. 스먼칸에 도착했던 순간에도, 기념 예배가 열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폴라드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 100주년 기념예배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저를 초청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예배당 옆, 조그마한 둔덕에 폴라드 선교사의 묘소가 있었습니다. 중국 서남부 사람들의 묘소 형태와 동일했으나, 무척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비석은 세 언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어와 영어, 그리고 그가 만든 먀오 문자였습니다. 묘소 앞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예전에 먀오족 사역자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사무엘 폴라드 선교사님은 저희 먀오족에게 있어서 구원의 별이었습니다. 그 분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먀오족의 신앙이 있었으며, 그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윈난성과 꾸이조우성 북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내 평생에 가장 훌륭한 분을 선택하라면, 주저하지 않고 폴라드 선교사님을 택할 것입니다.”
폴라드 선교사는 오래전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훌륭한 신앙의 선배로 살아있었습니다. 눈으로는 만날 수 없으나, 마음으로는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젊음을 드리고 생명까지도 바친,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묘소를 바라보았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上帝忠臣 (하나님의 충신)”
그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은, 선교를 시작하는 제가 앞으로 어떠한 자세로 일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아울러, 지난 몇 일 동안 계속 왔던 “동쪽으로 가라”는 음성들은, 그러한 자세로 일할 때에 어떤 열매가 맺혀질 것인가를 미리 보게하려는 하나님의 이정표였습니다. 저는 폴라드 선교사의 헌신을 통해 100년 후에 이토록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힌 것을 보았듯, 저의 헌신을 통해 또 다른 100년 후에 맺혀질 아름다운 열매가 있음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
시간이 흘러, 선교 사역 18년 차가 되는 2016년 겨울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날씨가 무척 맑았습니다. 한국의 매서운 겨울의 날씨와 달리, 상쾌한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목표하고 있는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오래 전 원나라 때 점령군으로 내려왔던 몽골족들이, 원나라의 패망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옛 신앙은 라마 불교였습니다. 지금은 인근에서 거주하는 종족들의 영향을 받아, 거의 모두가 이슬람교로 개종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별도의 종족 공동체를 이루었고, 언어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선교적인 용어로 ‘미전도 종족’이었던 것입니다.
미전도 종족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탐의 기간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날의 사건이 있기 전에도 몇 차례에 걸쳐서 그 지역을 정탐을 했습니다. 그날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그들의 지역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상황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 날따라 유달리 눈에 들어왔던 것은 커다란 이슬람 사원이었습니다. 그 사원 위에 눈에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서 머리에 이슬람식 모자를 쓴 남자들과 천을 두른 여인들이 사원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주의 자녀들이 찬양하고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가 만들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기회가 마련되게 해 달라고, 그곳에서 복음 사역자가 일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이 형성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있어야 할 여러 요소들을 마음 속을 마음에 되새기며 집으로 향하는 시외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인근 보관소에 맡겨 두었던 전동 오토바이를 탔습니다. 버스 터미널에서 집까지 약 한 시간 반의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 시간 내내 입에서 찬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커다란 담대함이 마음에 가득하게 차오름을 느꼈습니다. 영적인 충만함을 누린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집까지 10여 분을 남겨두고, 좁은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대로와는 달리 승용차가 간신히 교차할 수 있는 폭의 도로였습니다. 차가 갑자기 앞뒤로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정도로 극심하게 정체되었습니다. 차들이 클랙션을 울려대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전동 오토바이를 탄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두 대의 고급 승용차에서 건장한 청년 여섯 명이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남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전동 오토바이와 함께 쓰러진 남편을 발로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심하게 풍겼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쓰러진 남편을 몸으로 덮었습니다. 그러자 청년들의 발길질은 저를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한국인임을 밝히며, 더 이상 때리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청년들은 오히려 저의 머리채를 잡더니 차 범버에 마구 찧어 댔습니다. 급기야는 땅에 머리를 짓이기며, 동시에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저는 중국말로 “사람 살리라”고 “도와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서있던 사람들은 그저 팔장을 끼고 쳐다만 볼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러다가 맞아 죽는 것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저는 아직도 선교사로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그러자 갑자가 그토록 차로 막혀있었던 길의 정체 현상이 풀렸습니다. 무차별적으로 저희 부부를 폭행하던 청년들은 황급히 차에 올라 떠났습니다. 저는 혼미한 정신이었지만 핸드폰을 꺼내서 그들의 차량 번호를 찍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남편은 치아에 손상이 있었고, 저 또한 얼굴 부분에 많은 통증이 있었습니다. 의료진은 뇌출혈을 의심했으나, 감사히게도 뇌출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릎 관절에 있었습니다. 무릎의 중요한 부분에 다중 골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6개월 이상 기브스를 하고 지내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중국의 형사법 상 무조건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아야 하는 정도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집단적으로 구타했기 때문에 가중처벌되는 범죄였습니다. 이 소식은 빠르게 한인사회에 퍼졌고, 한국 영사관에도 그 소식이 전달되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지 2일 후, 여섯명의 청년들이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제가 핸드폰으로 찍은 차량의 사진과 한국 영사관의 협조로 인해 빠르게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경찰서에서 “자신들은 술에 취해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들을 욕하는 것으로 알아, 화가 난 상태에서 저지른 것 같다”는 내용의 진술을 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기브스를 하고 통증을 견디며 지내는 시간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힘들게 했던 것은, “너 이래도 계속해서 선교를 할래?”, “맞아가면서까지 선교할 필요는 없쟎아?”라는 음성이 귓가를 스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라도 철수해서 편하게 지내”, “네가 할 만큼 했어. 네가 세운 영혼들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니?”라는 소리가 메아리와 같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마다 마음으로부터 앞의 속삭임과 비교되지 않는, 큰 목소리가 울려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울림이 있는 소리였습니다. 그 목소리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여 나의 십자가를 졌으니, 너도 너의 십자가를 지도록 하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오래 전 “동쪽으로 가라”고 했던 목소리와 동일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그 청년들에게 실형이 내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청원서를 썼고, 그들은 석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하여 복된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들이지, 우리들로 인해서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근거한 판단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 영적 전쟁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이미 영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찾아 와서, 그곳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바꾸려 하는 이들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저희 부부를 죽여도 시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탄을 제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사탄이 공격하고 싶고, 실제로 공격해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다시금 확인합니다. 저는 이러한 주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최근까지도 계속하여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희 가정은 올해 겨울에 중국 선교상황의 급격한 악화로 인해서 부득불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주머니에 16만원을 지닌 채로 찬바람 부는 인천공항의 문을 나섰습니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저희 가정은 이제 굶는 일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끼니를 거른 적이 없고, 돈이 없어서 꼭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어떤 신실한 집사님 가정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선교사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사님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를 통해 땔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돌봄을 받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 교회의 목사님, 사모님 그리고 교우들과 믿음의 교제를 하면서 많은 영적인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간증의 기회를 통해, 그 교회와 목사님 내외분의 사역 위에, 그리고 아낌없이 헌신하시는 집사님의 가정과 산업 위에, 제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동일하게 임하고 있음을 믿으며 더욱 풍성한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께서 만나게 하신 홀리네이션스 선교회 위에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 날마다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도 말씀을 읽을 때마다 주님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여 나의 십자가를 졌으니, 너도 너의 십자가를 지도록 하라” 저는 그 내면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항상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살아있는 한 주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매일 체험할 수 있도록, 선교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저의 손을 붙잡아주십시오. 제가 살아있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