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편 18:29)”
간호부장 정송자 사모님의 간증
2018년 9월, 간호사가 되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을 따라 간호대학을 졸업한 후 1985년부터 시작된 병원생활이 마무리되면서 제 인생의 1막이 막을 내렸습니다.
유년기~경남 진양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과 오빠들의 사랑을 받으며 저는 철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9살이 되던 해 진주 남강 댐 공사로 인해 고향 땅이 수몰되자 부모님은 보상금을 받고 부산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고향 땅을 떠나면서도 다시 돌아오고 싶었던 어머니는 중학교를 진학하게 되는 큰언니는 외가에 맡기고, 작은 언니와 저를 데리고 그 당시 오빠들이 유학 중이던 부산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큰 오빠가 등산을 갔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랑 11살 차이가 나는 오빠는 지금 생각해도 대단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였고, 막내인 제게 쏟은 사랑은 저의 유년 시절을 풍성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때 오빠로부터 넘치도록 받은 사랑은 나이가 든 지금도 자주 생각이 납니다. 큰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와서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가족들 외에 친구들과의 어울림이 없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큰 언니는 밖에 나가기를 싫어하고 집에만 있으려 했습니다. 종내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귀신이 들렸다는 수근거림을 듣기에 이르렀습니다. 큰 아들을 잃고 큰 딸마저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게 되자 어머니는 큰 언니를 데리고 전국을 다니며 치료에 모든 시간과 재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예수를 소개받다~그러던 중 예수를 믿은 지 얼마 되지 않던 옆집 청년이 날마다 큰 오빠를 찾아와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계속 찾아오는 그 청년의 요청이 부담스러웠던 오빠는 대신에 제게 큰 언니를 데리고 교회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 교회에 갔던 날, 알 수 없는 눈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그때는 저녁예배를 드리던 시절이었는데, 11시 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다락방에 들어가 하루종일 눈물을 흘리다가 저녁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제가 언니랑 교회를 다니게 되자, 교회에서 매일 기도하시던 어느 권사님께서 제게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담요를 교회 장의자 밑에 두고서 권사님 옆에서 기도하면서 새벽기도를 마친 후 학교에 가곤 했습니다. 혹시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어 저녁에 못가는 날에는 새벽 1,2시에 잠이 깨어 교회에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20분쯤 걸어서 교회엘 갔습니다. 새벽에는 모든 사람이 다 돌아간 후에까지 큰 언니를 고쳐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제사가 없어지다 ~교회에 다니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마다 할아버지 제삿날이 되면 저녁 무렵에 고모님께서 저희 집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대문 밖에서 오시는 고모님께 오늘부터 우리는 제사를 안 지낼 것이니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모님께서는 영문을 몰라 했고 저는 들어오는 고모의 발걸음을 따라 다니며 집으로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당황한 고모님은 대문 앞 떨어진 곳에 몇시간 앉아 계시다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고모님은 70이 넘은 노인이셨고 저는 갓 20살 지난 청년이었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화가 난 아버지께서 제가 들고 다니던 성경책을 찢어버리셨습니다. 그날 이후 저희 집에 제사가 없어졌습니다.
이후에 고모가 돌아가시자 울면서 교회로 달려가 목사님께 말씀드리고 예배를 드려 달라고 했는데 그때 어색한 분위기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야긴선교회 ~어느 해, 교회 전도사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는데 저를 야긴선교회로 인도했습니다. 부산의료원 행려병동에서 토요일마다 복음을 전하고, 여름이면 시골교회에 가서 하계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교회가 없는 마을에 교회를 하나씩 개척해 나갔습니다. ‘사랑의 노래를’이란 악단을 만들어서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선교회였습니다. 부산의료원 행려병동에 환자들은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그리고 보호자들이 없어서 선교회원들이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목욕시켜 주기, 소변통 비우기, 청소하기 등등... 행려병자들의 치료가 끝나 집으로 연락을 해도 가족들의 반응은 냉랭하기 일쑤였고, 퇴원을 해도 갈 곳이 없는 그들은 또다시 몸이 만신창이 되어서 의료원 행려병동 앞에 쓰러져 있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교회에서는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도하면서 땅을 사기 위해 모든 힘을 모았습니다. 그 당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1985년도에 어간에 병원에서 월급 25만원을 받으면서 8만원 짜리 통장을 두 개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자신를 위하여, 또 하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쓸 목적으로...3년 저금이 끝나기 전 저는 결혼을 했고, 그해 가을 만기가 된 적금을 찾아서 야긴 선교회 목사님께 갔다 드렸습니다. 목사님께서 남편과 의논한 일이냐고 염려하시며 물어보셨습니다. 제가 작정한 일이어서 남편도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서울생활~아이가 7살이 되던 해에 수도권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에 있는 교회에 부임을 해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교회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다시 새로운 임지를 물색하던 중 IMF가 터지면서 가기로 했던 교회에서도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목회자들은 사택에 거주하였었는데, 거처할 곳이 없어지자 우리는 잠시 피할 곳을 찾아 일산 외곽지대로 왔습니다. 다음 임지를 기다리면서요. 그러나 낯설은 서울 생활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친정집이 경매에 넘어가면서 부모님이 거처할 곳이 없어질 위기가 닥쳤습니다. 아버지는 생전에 집을 오빠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는데, 오빠가 사업을 하며 그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썼다가 IMF 영향으로 집이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통장 잔고는 물론 용돈까지 다 긁어모아 부모님의 집을 무리하게 잡았지만 그 뒷감당은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 일산에는 새벽 안개가 많이 끼었는데, 안개만 끼면 저는 안개속에 쪼그리고 앉아서 하염없이 울곤 하였습니다. 거의 수습이 될 무렵, 우리에게 미안했던 오빠가 집 명의를 이전해 가라고 했지만, 우리가 그 집을 가져가면 오빠는 집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싫어서 오빠 집이 두 개가 될 때 그 집을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그 집에서 편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둘째가 생기다~ 그렇게 7년이 지났습니다. 그 시절을 광야생활이라 표현하곤 합니다. 그 어렵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경로를 통하여 둘째 아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24시간 시간 갑갑한 시간 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아이의 웃음은 모든 무료함과 염려와 걱정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아이를 좋아했던 남편은 아이가 잠들 때까지 아이랑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고, 노래해 주고.... 아이가 주는 행복을 맘껏 누렸습니다.
간을 기증하다~둘째 아이가 6살 되던 해에 남편 친구가 6개월 시한부 생명인 것을 알고 혈액형이 같은 남편은 친구에게 간을 기증해 주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고, 땅을 팔아서 수술비용을 대주는 장인이 있었고, 없는 것이라고는 건강 하나였습니다. 반면에 남편은 아무것도 없었고, 건강한 몸 하나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에게는 건강한 몸 하나 밖에 없는데, 그것까지 드려야 하나요?’ 하면서 저는 어떻게든지 이 수술이 진행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수술준비는 저의 바램과는 달리 오차 하나없이 착착 진행되어 갔습니다. 마지막 수술서약서에 동의 날인을 하고 돌아오던 날 저는 심한 몸살을 앓았습니다.
그 당시 작은 아이를 안고 밤에 자리에 누우면 아이의 심장 뛰는 소리가 콩닥콩닥 너무나 크게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하나님, 이 아이는 아버지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아이입니다’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수술 전날 나는 남편을 간호하기 위해 두 아이를 부산에 있는 친척들에게 맡기고 왔습니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을 도와주냐는 따가운 시선을 뒤로 느끼면서요..다시 돌아올 때 부산에서 서울까지 긴 시간 동안 물 한모금도 목으로 넘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산 병원엘 갔는데 남편 친구는 제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했습니다. 마치 자기가 너무 잘 살아서 친구가 간을 기증한다고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듯 얘기하고, 축하를 주고 받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싫었습니다. 내 마음은 이리도 슬픈데.. 그때 직장에다 7일간 휴가를 내었고.. 수술 후 설상가상으로 제가 혼자서 세 사람을 간호하게 되었습니다. 아산병원의 간이식 수술 방식은 두 사람의 간을 잘라서 한사람에게 붙여주는 것이었는데, 남편 친구는 아내와 남편의 간을 이식받게 된 것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80이 다된 분이셨는데 간호를 하겠다고 마산에서 올라 오셨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때마침 구정 주간이라 모든 가족이 설을 지내려고 돌아간 후 제가 세 사람을 돌봐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아서 수술을 했던 터라 예후가 좋지 않았고 열이 떨어지지 않아 0.1도만 열이 올라가면 다시 수술실로 가야하는 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온몸에 황달이 오고 모습은 마치 할아버지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수술을 한 친구는 통증을 참지 못하여 그냥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수술을 해서 고생한다며 원망을 해댔습니다. 나는 아파서 몸부림치는 환자에게 조용히 하라고, 이 수술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데 그 아픈 것 하나 못참느냐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15분에 한번씩 확인하는 체온을 보느라 그 밤에 이 병실 저 병실을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아내는 옆 병동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새벽이 되자 다행히 열이 떨어졌고 저는 남편 옆 보호자 침대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수술 전 남편 친구는, ‘내가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살아야 아이들 결혼하는 걸 볼 수 있을까?’ 하며 날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나이 계산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랬던 아이가 자라서 간호사가 되어 지난 달에 전도사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날 남편은 새 가정의 축복기도를 부탁 받고 부산까지 내려가 그들을 온맘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일산으로 돌아오는 내내 저희 부부는 지난시간을 돌아보며 쉬지 않고 대화를 했습니다. 오늘 친구 딸아이의 결혼식을 보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것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쉼터일산교회 ~세 사람이 차례차례 퇴원을 했고 남편은 아산병원 병실에서 교회를 개척해야겠다고 말씀을 받았습니다. 아직 잘라낸 장기가 제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교회장소를 찾아서 공사를 직접 시작했습니다. 아픈 배를 움켜잡고, 힘들 땐 쉬어가면서요.. 그렇게 해서 2004년에 쉼터일산교회가 출발되어졌습니다. 간을 기증받은 남편 친구가 퇴원하던 날 친구 아버지 목사님께서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사모야, 수술비로 1억을 예치하고 진행했는데 다 쓰고 돈이 남았으니 남은 돈을 보내 주겠다”구요. “아닙니다, 저는 그 돈을 받고 싶지가 않습니다, 저희는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저의 속마음이기도 했습니다..
러브콜~개척 5년차가 되었을 때 청도에 행려환자들의 재활공간을 만들어서 사역하시던 야긴선교회 목사님께서 후임으로 저희 부부를 지명하고 요청해 왔습니다. 그 중간에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고, 남편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고령화시대에 마땅히 준비되지 못한 주윗분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공동체의 삶을 소망했던 우리의 2막을 펼치기에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우린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대략 5년 정도를 준비기간으로 설정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5년 후면 선교회 목사님은 70이 되어 은퇴하시고, 저희 큰아이도 대학을 졸업하는 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6만평이 되는 땅에 1,2,3단계 계획들을 이사회에서 발표했을 때 모든 이사님들이 좋아라 했습니다. 이전에 야긴선교회에서 같이 일했던 분들도 30년이 훌쩍 지나 장로, 목사, 권사, 선교사가 되어서 우리 부부가 후임으로 가는 일에 자신의 일들처럼 관심을 표하곤 하였습니다. 매년 10월 3일에 그곳에서 야긴선교회 홈커밍데이를 하기로 하면서 하나하나 준비해 갔습니다. 마치 제2의 야긴선교회가 시작된 것처럼 다들 기뻐하였습니다.
5년에 걸친 준비가 퍼즐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보기 좋게 진행되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까워오자 이전에 보지 못했던 목사님의 태도가 우리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이취임식 예배 순서지까지 나온 상태에서 부임 전 마지막 이사회를 마치고 온 남편은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선교회 목사님에 대해서, 청도의 시설에 대해서 저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시설은 어떤 경우에도 존속되어야 할 것이기에 자신이 모욕을 감수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하고는 24시간 깊은 잠을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쉼터일산교회의 처소는 이미 다 정리가 되었고, 얼마 남지 않은 교인들은 청도의 시설과의 네트웍을 염두에 두고 인접한 작은 교회들과 연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힘든 시간을 보낸 작은 교회들과의 연합은 그리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2016년도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다 날아가버렸고, 2년 간의 마음고생으로 너무나 지쳐버렸습니다.
20살에 예수를 믿어 지금까지 열심히 따라온 결과가 지금 이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더 이상 믿음을 지탱할 힘도 없었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낮에 지치도록 일을 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면 머릿속이 환하게 불을 켠 것처럼 밝아져와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해 한의원에 가서 가슴에 침도 맞아보았습니다. 그해 여름 저는 노숙자처럼 공원을 배회하였습니다. 저녁을 먹고 공원 큰 나무밑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하염없이 뻗어져나간 나뭇가지를 바라보다 새벽이 되면 잠시 눈을 붙이고 출근을 했습니다. 모기가 나를 물어도 나는 가렵거나 아프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공원 가로등 불빛에 책을 보면서 멀찍이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힘을 낼려고 해도 자꾸 주저앉는 저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고 가족들에게 화를 내는 제 모습이 너무 싫어서 저녁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저녁 금식을 하면서 조금씩 길을 찾으려하면 한걸음씩 다가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기적을 체험한다’라는 책
김연실 권사님이 경영하시는 미용실 ‘단장’에 갔습니다. 권사님께서 열심히 사시는 모습은 항상 나에게 큰 힘을 주었습니다. 권사님의 책꽂이에서 김상숙 권사님의 책을 권해 주셨는데 그 책을 읽고 삼위교회가 집에서 가까이 있는 것을 알고는 그 주일 오후에 외국인 예배에 참석해 보았습니다. 낯설고 물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은 나의 고통을 희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목요, 토요기도 모임, 목요 금식은 쥐고 놓을 수 없었던 나의 본성을 하나하나 점검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홀리네이션스에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한달에 한번 가는 교도소 방문은 가능할 것 같아 교도소 방문에도 무임승차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가까이 갈 수 없는 권사님 옆에서 나는 15시간 권사님을 독차지하며 믿음에 대한 개인 렛슨을 받았습니다. 나의 속사람이 든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디모데, 요한을 위로해 주기 위해 떠난 발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이 더욱 유익을 얻어 돌아오곤 했습니다.
이렇게 빛 가운데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김 OO 환자
그는 김포에 있는 투석실에서 모두 적응을 못하고 5년 전에 제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왔습니다.
군인출신이었던 그 환자는 모든 사람에게 반말과 잦은 욕설로 주변에 사람들이 가질 않았습니다. 투석 후에 지혈을 해야 하는데 유난히 지혈이 되지 않아 30분 이상 눌러야 하는데, 그러는 중 어머님은 시각장애, 동생도 장애, 본인까지 3명의 장애인이 함께 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측은한 맘이 들었고 그분에게 예수를 전해야 되겠다는 맘이 있었지만 쉽게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용기를 내어 시도해 보았는데 고약한 성질에 버럭 화를 내며 그딴 소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져 갔고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땅에서 저리 힘들게 살다가 지옥으로 가면 너무 불쌍할 것 같았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하자 그분의 필요가 눈에 들어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그에게는 큰 도움을 줄 때가 많았습니다. 조금씩 맘이 열려서 언제 또다시 예수를 전할 기회를 보고 있던 중 외래로 다닐 수 없던 그분은 인천 요양병원으로 입원해갔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안타까왔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도 못 얻고 .. 그러나 한달 후 그 환자는 요양병원을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제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왔지만 도무지 우리가 수용해 줄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다시 왔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회를 주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파주의 요양병원을 물색해서 그 환자를 입원시켰고 그는 매우 만족해 하며 고마워 했습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성경책을 한번 읽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다시한번 말해 달라고 했는데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무섭게 자기를 포장하고 있던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 순한 양이 되어져 갔습니다..
몸도 점점 좋아져서 성경을 일독 하기 전에 하나님 데려가지 마세요 하고 기도해 주면 깊은 주름사이로 쉴새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염치 없어서 어떻게 기도를 하냐고 웁니다. 하나님 그 영혼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홍 OO
18년 동안 제가 근무하는 병원을 따라 다니면서 투석을 하며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환자가 작년 11월에 천국에 갔습니다. 오랜 투병으로 지치고 힘든 생활은 마무리 되었지만 긴 시간 투석을 하며 함께 힘들어 했던 가족들을 남기고서요.. 갑자기 찾아온 엄마의 죽음으로 딸아이가 은둔에 들어갔습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한다는 아빠의 염려 섞인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가 일찍 세상을 뜬 것이 아빠 탓이라고 생각했던 얽혀 있는 감정 속에 들어가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더우기 엄마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어디가지 노출해야 하는지도 조심스럽고 엄마는 이 땅을 떠나간 상태에서..
얼굴을 보면서라기보다는 매일 성경 말씀을 보내주면서 짧은 멘트로 그 아이의 아픔을 나눴습니다. 엄마랑 좋은 관계를 유지한 나에게 이모가 없는 그 아이에게 이모가 되어 주겠다고 했을 때 좋아라 하며 마음문을 열고서 이것이 저것이 힘들고 싫다고 말했습니다..
“OO야, 엄마는 천국에 가셨다. 그러니 우리가 엄마를 놓아 드리자.” 처음 나랑 만남을 가졌을 때 자리가 조심스러웠던 아이가 긴 시간 울음을 참고 삭히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가 안타까웠습니다. 마음 놓고 울어도 되는데 아직 그리 편한 사이는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불교를 믿던 그 엄마는 그해 여름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자신이 죄인임을 받아들이고 제가 전한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천국을 소망하다가 간 것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한번 만남 이후에 더욱 맘 문을 열고서 세상 가운데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아직 그 아이에게 예수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를 몰라 주님께 계속 물어보고 있습니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있는 그 아이는 지난 주간에 인사동 아트갤러리에서 학교 친구들과 작품전시회를 했습니다. 하나님 그에게 복음을 선물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문학박사가 되다
2012년 남편의 권유로 사회복지를 접하게 된 것이 2018년 “혈액투석 환자의 스트레스가 주관적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죽음에 대한 태도의 조절효과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공부를 하는 내내 간호학과 사회복지학을 접목해서 인생 후반부를 보내고 싶은 소망이 뭘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간호대를 졸업하고 중환자실에서
근무를 하면서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친정아버지께서 뇌종양 진단을 받았는데 아버지께서는‘ 나는 더 이상 명을 이을 생각이 없다’고 하셔서 집에서 가족들과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이부자리, 사랑하는 가족들의 돌봄, 24시간 면회가 허용되는 아버지의 방..
이것이 존중받는 죽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온 논문을 들고 친구들은 강의 자리를 부탁하러 다닐 때 나는 논문을 들고 용인 샘물호스피스 병원 원주희 목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곳에서 직장인이 아닌 빛진 자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지난 30여년 동안 간호사로 살아오면서 자녀 양육을 끝냈고 이제부터는 가지고 있는 재료들을 사회에, 하나님 앞에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소망해 왔었기에..
2018년 기도 제목이 움직이다
오후예배 대신 교제와 기도회를 가지면서 각자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매주 점검하며 서로 중보하고 있습니다. 바늘구멍만한 희망이라도 보이면 그 구멍을 뚫고 빛 가운데로 나가자고 기도했습니다.
2014년 연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에 1차 합격한 딸아이의 면접이 주일로 잡혀서 그 면접 안봐도 된다고 가지 말라고 해서 꼬이고 꼬인 큰 아이는 올 여름에 영국계 회사에 취업이 되었고, 이제는 회사생활과 더불어 미국회계사 시험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아픔으로 주저 앉아 있던 남편도 다시 꿈을 꾸며 파주에서 땅을 개간하고 컨테이너를 꾸미고 주변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시설에는 절대로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던 어머니의 바램대로 큰 언니는 작은 언니 집 근처에서 동생의 돌봄을 받으며 주간보호센타에 잘 나가고 있습니다. 늘 큰 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많이 보았기에 지금은 조금도 슬프지 않습니다. 다음 주에는 큰 언니를 돌봐주시는 권사님이랑 셋이서 제주도 여행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저의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를 이루는 셈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또다른 아픔으로 힘들어 하시던 지성우 집사님도 힘을 얻어 일을 하시고 지금은 홀리네이션스 토요기도회에서 저랑 나란히 앉아 열심히 기도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돌아서 오긴 했지만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 나는 그 길을 분명 보았고 그 길에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이 동행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기뻐 춤추며 하나님을 높여 드린 것처럼 주님 앞에 어린아이같이 남은 시간을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설령 길이 열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주님을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