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과 신성의 선생님의 간증”
신 8:3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를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는 2남1녀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서울 혜화동에서 약국을 하시는 아버지와 약국을 도우시면서 살림을 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 큰 이모 가족, 결혼 안 한 이모들, 경북에서 올라온 삼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대 식구와 살다 보니 어머니에게 큰살림은 너무 힘에 힘이 드셨는지 저를 임신하시고 결핵성 늑막염에 걸리셔서 독한 결핵약을 드셨기에 주위에서 저를 걱정하셨지만 다행히 건강하게 출생하였습니다. 장남이셨던 아버지는 삼촌들에게 매우 엄하셔서 늘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저는 할머니에게 가서 무서워 이불을 쓰고 떨다가 잠든 적이 많았습니다. 권사님이셨던 할머니 영향으로 찬송가와 성경책은 늘 보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고 교회는 성탄절에만 선물 받으려고 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늘 바쁘셔서 저를 돌볼 시간이 없으셨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4년 터울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저는 부모님이 저와 동생을 다르게 대하신다고 느꼈고 사랑을 받기 위해 착하고 순종적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공부를 잘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깨달았습니다, 같이 살던 사촌 언니가 의학도였는데 해부학 공부를 하려고 사람 뼈를 가져와서 공부하는 모습이 너무나 멋지게 보여서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은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친구도 없이 공부하는 것에만 매달렸습니다. 1등을 못하면 너무나 비참하고 괴로워했고 오직 시험공부만을 위해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미션스쿨이라 입학식부터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설교 말씀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미국은 안가보고도 있다고 믿으면서 성경은 믿지 않느냐고 하신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한번 교회에 다녀 봐야겠다고 생각 했는데 3학년 성경시간에 다시 마음의 문이 열리며 교회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더욱 믿음을 굳게 되었는데 선교회에 속하여 매주 찬양 연습하며 설교 말씀을 들었는데 말씀을 들으며 중국선교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꿈은 의료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재수를 하여 어렵게 의대에 들어갔는데 믿음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휩쓸려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공부를 해도 머리에 안 들어오고 잠을 자면 해부학 시간에 시신들이 떠올라 가위 눌렸습니다. 신경쇠약으로 도저히 학업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해부학시험에 백지를 내었고 유급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고 친구가 선교회로 초청하였고 저는 6개월간 매일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말씀 읽고 소감 쓰고 발표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저는 다시금 주님을 만났고 비전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게 다시 힘을 주시고 의학공부를 마칠 수 있게 도우셨습니다. 졸업은 하게 되었지만 학교 병원에 20% 밖에 남지 못하기에 인턴을 하게 될 병원을 찾는 과정에서도 주님께서 저의 목자 되심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서울 근교 작은 병원에서 교회 친구가 영양사로 있는 친구 소개로 인턴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매일 환자가 오는 앰블란스 소리를 들으며 간절한 기도로 하루 하루를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견디어 나가니 주님께서 생각지도 못하게 레지던트 자리도 예비하셨습니다. 인턴으로 근무하던 병원의 진료부장님이 의대 다닐 때 늘 선망의 대상이었던 대학병원에 마취과에 갈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선교사들의 사랑과 헌신이 아름답게 열매 맺은 그곳에서 훌륭한 마취과 교수님들께 수련을 받게 되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서 먼저 신앙이 좋은 사람이고 대화가 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를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레지던트 중에 친구들의 결혼 소식이 이어지니 저도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가끔 소개를 받곤 했는데 신앙이 없는 분들이라 만남이 이어지지 못했고 인턴때 교회 선배가 소개 시켜준 지금의 남편이 일 년에 두 번 정도 연락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사람을 다시 만나 교제하면서 순수한 주님을 향한 열정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남편의 아버님이 호남 출신이시라 탐탁하지 않게 여기셨고 집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시더니 더욱 더 반대하셨습니다. 반대를 거세게 하셔서 집에서 쫓겨나 병원에서 생활하게 된지 6개월 지나 부모님께서 결혼을 허락하시고 그 다음해 결혼하였습니다.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신혼집에 돌아오니 시동생 둘이 학교가 가깝다는 이유로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레지던트 월급이 얼마 되지 않는데 다달이 결혼비용을 어머니께 갚으면 차비도 없어 걸어 다녀야 하는데 어머니가 거의 매일 오셔서 살림을 해주시니 감사는 하면서도 빈손으로 보내드릴 수 없어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첫 아이를 가진지 모르고 밤새고 당직하고 집에 들어오니 시어머니와 시동생이 안방에 있으니 쉴 곳이 없어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다 친구의 집에 갔는데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시어머니께 사과를 드렸지만 그 후 시동생들은 저희 집에서 나가게 되고 남편과 관계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임신7개월에 파견 갔던 병원에서 이틀에 한 번 당직 하면서 계속 밤을 새서 그런지 조산하여 34주에 아들이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얼마 후 친정아버지가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습니다. 그때가 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저희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고 아버지는 쓰러지시기 전에 먼저 한쪽 눈을 실명하시며 여러 분들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장로님께서 기도해주셨는데 그때는 그 분께 고마움을 잘 표현하지 못해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아기는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고 아버지도 중환자실에 계신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답답하고 힘들었습니다.
제가 친정아버지를 면회하러 갔을 때는 이미 의식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돌아가셨습니다. 50대 중 후반의 나이에 돌아가신 것이 너무 안타깝고 제대로 효도 한 번 못한 것이 가슴이 아팠지만 천국에서 만날 소망이 있어 감사합니다. 그 후 기도의 용사이신 시어머니께서 아들을 키워주시며 살림을 해주셔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이 되면서 시댁 옆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시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해 시동생들이 저희 집으로 피신 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근처에 사는 큰 집 가족까지 저희 집으로 와서 집안은 늘 북적거렸습니다.
저는 주님을 거의 잊고 생활의 염려에 빠져 가족들을 섬김 기력이 없었기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 몇 번을 돌고 나서야 집에 돌아가는 날이 많아졌고 전문의 시험 볼 때는 늦게 들어가면 다 자고 있기에 아예 병원에서 살면서 시험공부를 하였습니다. 남편은 결혼 후 IMF 터지고 나서 퇴사한 뒤 잠시 매장을 하다 접고 있어 저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교회에서 남편에게 안수집사를 준다고 헌금하라고 할 때도 남편 퇴직금을 다 헌금했고 목돈을 다 헌금하며 주님 은혜 감사 드렸는데 담임목사님은 십일조 1000만원 헌금하는 100가정을 달라고 기도하셨고 저는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개업을 했습니다. 월요일에 수입은 전액 헌금하고 어떻게든지 잘하려고 애썼는데 의약분업 사태로 파업하면서 병원 문을 닫는 날이 많아지고 전에 근무하던 병원 두 군데 야간수술 마취를 하면서 다시 병원 봉직의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개업을 접고 남편과 관계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의약분업 사태로 수술 환자가 밀려들어 수술이 밤늦게 끝나자 강북에서 경기북부까지 출퇴근이 어려웠기에 병원에서 자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남편에게 병원에서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자고 말했는데 전혀 고려해보지 않고 어머니 가까이 에서 살아야 한다고 거절했을 때 이혼을 생각하고 고심 끝에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준 어느 목사님의 설교테이프를 듣고 제가 믿음을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며 새롭게 믿음생활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님은 8년 만에 마흔이 다 된 저에게 귀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딸을 주시길 계속 기도했는데 노산 이지만 주님께서 건강하게 출산하게 도우시라는 믿음과 장애가 있어도 낳겠다고 결심하고 아예 양수검사를 안 했습니다.
그 무렵 시어머니 교회 담임목사님이 목적헌금을 사적으로 쓰시는 것을 알게 되고 교회를 떠나 다른 교단으로 교회를 옮겼습니다. 그 교회를 통해 남편과 저의 갈등을 부부학교를 통해 풀어나가 관계가 회복되고 딸아이를 낳아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딸아이가 4세가 되자 남편은 신학을 공부하고자 방향을 잡고 공부하였습니다. 두 번째 도전하여 경쟁률이 높았지만 원하던 신학대학원에 합격하여 목회자로 훈련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남편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중국어과를 졸업했는데 일본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습니다. 저도 결혼 전에 중국선교사로 쓰임 받고 싶어서 중국어 전공한 남편과 결혼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남편은 신학공부하기 전부터 오랜 기간 일본어를 계속 공부하며 일본선교 비전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바닥을 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저는 기도로 준비하지 못했고 저희 가정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사춘기가 되었던 아들은 동생만 편애했던 아빠에 대한 미움을 동생에게 퍼부었고 저는 두 아이들 사이에서 넋을 놓고 저의 병원일 하나도 감당 못하여 사는 것이 괴로움 자체였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었으면 힘이 날 텐데 남편도 힘들게 교인들과 지내고 있어서 더욱 지쳤습니다. 병원에서도 젊은 환자의 마취사고로 인해 너무나 안타까웠고 괴로움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취사고 당사자인 후배와 관계가 안 좋아지고 같이 근무하던 친구와도 소통이 어려웠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한 번도 교회를 빠지지 않고 나가 예배 드렸지만 주님께서 저의 피할 바위요 방패이신 것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늘 불평하고 원망하고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다 세월을 다 보낸 것 같습니다. 남편이 1 년 만에 돌아오고 저희 가정은 다시 안정을 찾는 듯 했지만 남편은 일본에서 돌아온 아쉬움에 가족들을 원망하고 아들과 딸 사이는 너무나 위태로웠습니다.
시댁이 다니던 교회를 나와 9년을 다니던 교회를 떠나야 할 때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남편을 일본에 보내준 그 교회 담임목사님과 남편의 관계가 너무 얽혀서 풀 수 없었기에 나올 수 밖 에 없었습니다. 남편이 전도사로 있던 교회 목사님도 다 같은 노회소속이라 남편이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신학대학원을 합격하기 까지 잠시 기도했지만 다시 기도는 다 잊고 살았던 터였습니다. 남편이 전임전도사로 섬김 곳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인간적 방법으로 해보려 했으나 남편이 나이가 많아 갈 수 있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은혜로 남편 동기 목사님이 경찰서에서 기관목회를 통해 전임전도사를 받고 목사안수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동시에 저도 크나큰 모험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10년 가까이 근무하던 직장을 나와 레지던트 수련 받은 병원으로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40대 후반이지만 대학병원으로 가서 다시 새롭게 배우고 싶었습니다. 마취사고를 경험하고 나니 마취가 너무나 두렵고 무섭기에 더 큰 실력을 키워야 했습니다. 같이 근무하던 친구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저와 친구는 매우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저희가 레지던트 생활 할 때 보다 몇 배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로 위로 하며 힘이 될 줄로 생각했던 사이가 점점 틈이 벌어지고 원망과 미움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누가 먼저 그랬는지 모르나 식사를 할 때도 따로 앉았습니다. 그 친구는 자녀가 공부를 다 잘하고 남편도 직업이 튼튼했기에 저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대화 할 때 저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하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말에 상처를 받게 되어 친구를 피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보면 친구였던 사이라고 전혀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대학 병원에서 근무하는 5년 8개월간 저의 모습과 생활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몸무게가 10Kg이상 빠졌고 새벽형 인간이 되었습니다.
6시 40분까지 출근해서 마취 준비하고 컨퍼런스 참석해야 했기에 5시에 일어났습니다. 처음 3년간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로 인해 체중이 줄었습니다. 또한 점심시간이 20분 안에 식사하고 양치해야 해서 늘 씹지 않고 넘겨서 역류성 식도염이 생기고, 마취 중에 중환자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면역체계에 이상이 오고 방사선에 노출이 자주 되어서 그런지 갑상선기능저하증이 생겼습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슬프고 기운이 없었습니다. 혹시 암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싶어 정밀검사도 받았습니다. 손이 저려서 밤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자주 깼습니다.
남편이 목사안수 받은 2년 뒤부터 집에서 남편과 집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교회에서의 여러 섬김과 봉사, 성도간의 교제가 그리웠습니다. 그때 저의 낙은 여행이었습니다. 2년 간 잠시 나가던 교회에 헌금을 마치면 해외여행 가리라 다짐했기에 친구들과의 여행을 시작으로 3년 전에는 4번까지 간 적도 있습니다. 주로 가까운 곳이지만 여행중독이 된 것처럼 여행을 다녀오면 바로 다음 여행을 계획하면 그 즐거움으로 살았습니다. 3년 전에는 저희가 살 던 집이 전세 계약 전에 팔리고 새로 집을 산 사람이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이지만 이사를 오고 싶다고 해서 이사할 곳을 알아보다가 살던 곳에서 찾지 못해 이곳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남편이 교육전도사를 한 곳이고 전에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이 개업을 하고 있는 곳이라 인연이 있던 터였습니다. 아파트보다 주택에서 살고 싶었기에 제가 우겨서 상가주택을 계약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1층에서 약국을 하시고 그 위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었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이사하기 전에 단열공사를 했지만 이사를 해서 여름과 겨울을 지내며 혹독한 더위와 추위를 겪고 얼마나 후회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남편과 아이들은 저를 많이 원망했고 저는 신경쇠약에 걸려 이명이 심해졌고 아무도 없는데도 누가 뒤에서 죽이는 것이 아닌가 하여 자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저희를 뽑아주신 과장님이 정년 퇴직하시고 새로운 과장님이 오시자 점점 힘든 일을 맡기시고 연봉이 높고 교육비 보조를 받는 저희들이 은근 그만두었으면 하는 내색을 하였습니다. 저도 너무나 중환자가 많은 방을 배정받아 더욱 더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매일 출근하는 전철에서 큐티와 말씀을 보았지만 매일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다윗의 믿음으로 싸우기보다 패배하여 쓰러지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매일 출근 전에 남편과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들으며 마음을 다 잡고 비장하게 수술실로 향하는 나의 모습이 불쌍하고 가련했습니다.
몸무게가 점점 빠지고 음식을 거의 소화시키지 못해 같이 전에 근무하던 선생님의 병원에 자주 가게 되자 선생님이 안타깝게 여겨 홀리네이션스 선교회를 소개시켜주셨습니다. 처음 간 날은 중학교 은사님을 모시고 식사하기로 친구랑 미리 약속이 있어서 이른 아침 6시까지 가는 게 쉽지 않았는데 갈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처음에는 말씀 듣는 것은 즐거웠으나 1시간 기도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한 주 한 주 시간이 지나니 기도시간도 즐거워졌습니다. 어느 주에는 권사님께서 금식에 대한 말씀하셨는데 저도 금식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목요일 금식기도를 시작한지 2년이 되어 갑니다. 첫 금식기도하고 이틀 후 기도시간에 직장을 옮기게 해달라고 기도가 나왔습니다. 아직 계약기간이 많이 남은 때라 기도는 하지만 몇 개월 지나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월요일에 출근해서 오전에 제가 사는 곳에 자리가 났다고 알아보라고 동료들이 성화였습니다. 같이 근무하던 친구가 먼저 자리를 옮기고 남은 동료들도 좋은 자리 찾아 나서려고 시간만 나면 초빙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기도했기에 용기를 내서 전화한 결과 지금의 직장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곳으로 이사하게 된 큰 이유 중 원룸의 전세를 월세로 돌려서 일을 줄이고 싶었습니다. 풀 타임으로 일하는 것이 자신이 없고 좀 쉬고 싶었습니다. 아이들 낳을 때 말고는 길게 쉬어 본적이 없었기에 가장으로서의 중압감이 너무 무거워 혹시 일을 못하게 되더라도 생활을 할 수 있게 대비하고 싶었습니다. 입 안이 늘 헐어있고 종기가 아물지 않고 안 아픈 곳이 없는데 잠도 잘못 자고 잘 못 먹으니 미래가 어둡기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집 가까이에 직장이 있으니 너무 좋았습니다. 게다가 원장님께서 장로님이시고 매일 예배를 드릴 수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병원 건물도 수술실도 직원들까지 너무나 좋았습니다.
저는 역류성 식도염에 금식이 안 좋다는 것을 알지만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퇴근할 때 전철에서 쓰러질 뻔 했습니다. 식은땀이 줄줄 나고 어지럽고 서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 세 번 거듭하면서 저도 모르는 기쁨이 배 안에서 흘러나와 자꾸 웃음이 났습니다. 아직 대학병원에서 근무할 때 어려운 환자 수술 할 때도 힘이 들지 않고 제가 발을 딛지 않고 날아다니는 것 같이 사뿐 사뿐 다니며 마취하는 것이 느껴져 신기했습니다. 매주 수요일이 되면 약간 근심하지만 금식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힘이 안 들고 주님의 음성이 더 잘 들립니다.
그리고 성경말씀도 마음에 팍팍 꽂힙니다. 사실 말씀에 대한 목마름도 컸기에 1년 6개월간 매일 40장씩 읽다가 너무 속독하는 것 같아 20장으로 줄였는데 매일 5시에 일어나던 습관 덕분에 성경을 깊이 읽을 수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새벽에 시간이 안 나서 말씀을 나중에 읽으면 새벽에 오는 감동이 덜 한 것 같아 새벽에 말씀보기를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홀리네이션스 동역자들과 같이 금식기도를 하니까 점점 더 힘이 나고 금식기도가 힘들기보다 기쁨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2년 되었는데 아직 가족만 예배 드리고 있습니다. 남편은 국내에서 전도하고 교회 개척에 뜻이 없고 일본 선교에만 관심이 있어 일본방송을 주로 보고 일본에 갈 생각만 합니다. 아들은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서 취직을 하고 있고 딸은 일본으로 제과제빵을 하려고 유학 간다고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 합니다. 주님께서 저희 가족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온전히 쓰임 받게 하실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저는 예전에 중국 선교사로 가겠다고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서원했기에 늘 선교에 빚진 심정이 있어서 홀리네이션스 선교회에서 외국인들 돕고 공부시키고 교회개척 하는데 쓰이는 물질 헌금하는데 쓰임 받게 되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예전에 여행 가던 비용을 줄이고 에너지를 아끼고 근검하고 절약해서 헌금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헌금할 때 하늘에서 오는 기쁨이 마치 적금통장에 저축한 것을 도장 받듯이 주님께서 알게 하신 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연장근무 수당과 성과급을 헌금, 이웃 돕기에 전액 드리기로 해서 실천하고 있는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헌금뿐 아니라 이웃사랑을 위해서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전도에 대한 마음을 주셔서 말기 암환자를 돕는 호스피스 교육을 받게 하셨는데 잘 쓰임 받게 되길 소원하고 기도 드립니다. 주님께서 저를 향한 그 측량 못할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고 관계가 악화되었던 친구와 화해하게 해주셨습니다. 제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어릴 때 오빠에게 받은 상처로 마음을 닫고 비수 같은 말을 쏟아내는 딸을 품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참으로 부족하고 모자란 아내요 엄마였음을 깨닫게 되자 이제껏 우리 가정을 붙드시고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가 넘치고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싫어하고 잘 못하는 살림이지만 하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분들에게도 이 행복 전하고 싶고 모르는 분들에게 꼭 우리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주님 나라 가는 날까지 주님과 손 꼭 붙잡고 매일 기쁨의 동행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