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현장대학에서 맨토들”
이천에서 열릴 예정인 성결교 경기 동지방 47 개교회 모임에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을 받고책임을 맡은 신진숙목사님을 같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전에 내가 중앙성결교회 오래 참석한것을 알고 신현수 목사님을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신현수목사님 오랫동안 서로 소식이 없이 지냈는데 처음 목사님께서 제게 권면해 주고 가르쳐 주셨던 생각이 나서 신진숙목사님을 통해서 전화번호를 받아 서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목사님한테 받은 권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는 1981 년이었습니다. 중앙성결교회에서 부목사님이 압구정동에 건물 한층을 세를 얻어서 개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500 만원이었고 여전도회 5 기관에서 각각 100 만원씩을 내서 지으라고 당 회장 이만신 목사님이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갑자기 새로 분리해나간 가장 어린 5 여전도회에 애숭이 같은 내가 여전도회 회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담당여전도사님은 싱글이었는데 내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기관장회의에 가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지시가 어디 있느냐? 어떻게 연세든 권사님들은 경제적으로도 더 여유가 있는데 35 세 미만에 대부분 집은 세 들어 살고 가난하면서 여전도회로 모이지도 않고 회원은 명단만 있고 오지도 않는데 100 만원을 같이 낼 수가 있느냐?” 이렇게 발언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담당 전도사님이 아닌 신현수 목사님(당시는 전도사님)이 나를 불러서 전혀 다른 권면을 했습니다. 기도도 해보지 않고 무조건 못한다고 하는 것은 참 신자가 가는 길이 아니라구요. 두분이 전혀 다른 의견이었는데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신현수 목사님 권면이 어려운 것을 직면해야 하지만 이 길을 택해보겠다고 선언을 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으니까 당시에는 철야기도를 하면 밤 9 시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기도를 마치고 끝이 났는데 교회는 동대문에 있고 우리 집은 봉천동인데 물론 자가용으로 있던 시절도 아니기에 대중교통을 타고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중앙성결교회는 동대문에서 내려서 교회까지 꽤 걸어서 언덕을 올라갑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큰 산을 넘어서야 하기에 울며 불며 기도하니까 목소리가 다 쉬었습니다.
당시 우리 회원들은 몇 명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분들은 주일날 나와 대화를 하면 왜 그렇게 목소리가 쉬었느냐고 하면서 그 쉰 목소리는 이분들을 힘을 합치는 동기부여를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내서 이 일을 하자!” 집도 없고 애기들은 어린 이분들은 자신들이 할수 있는 집에서 봉투 부치는 일 같은 일거리를 찾아서 너도 나도 하니까 너무나 놀랍게 단시간에 155 만원을 헌금을 해요 5 기관 중에 우리가 1 등으로 약속한 금액을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36 년전이니까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인지 계산을 할 수가 없는 금액입니다.
가장 감사한 것은 이 경험은 그후 선교사역을 30 년을 넘게 하면서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다. 믿음의 안경을 쓰고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이런 교훈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만약 세상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힘들것만을 생각하는 권면을 따랐다면 아마 그후 홀리네이션스는 믿음의 이야기들을 날마다 펼쳐지는 것을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중앙성결교회는 아주 먼 거리에도 교회 등록하고 안 나오는 사람들도 많고 그런 상황에서 신현수 목사님께 심방 갈 때 나를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성경공부는 없었고 그렇게 전도사님들이 심방을 계속 다니면서 교인들을 돌보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자가용이 없으니까 전도사님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녔는데 신목사님은 하루에 10 여군데 이상을 심방하셨습니다. 그리고 회원들의 집을 알게 되고 그후에는 우리 여전도회 임원들과 그 집을 방문하여 이분들이 교회로 여전도회로 모이는데 처음 시작할 때 몇 명 모이지 않던 이분들이 일년동안 150 명이 모이는 가장 막강한 여전도회가 보여준 사도행전 29 장 이야기의 첫장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일반 버스를 타고 심방을 하고 목사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한 가정이라도 더 심방가기 위해 점심은 오가다가 시장터에 떡집 있으면 몇 개 들고 그렇게 다니신다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기도를 할수 있을까? 놀랄정도였습니다.
잠시 전화 통화를 하면서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우리는 서로 연락을 못한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도 우리 가정을 기도를 하신다고 하며 우리 자녀들 이름을 기억하며 안부를 물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도 중보기도를 하지만 정말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면 그 명단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가 없는 것을 알기에 놀랐습니다.
교인들도 많은데 지금처럼 장례식을 병원에서 해도 여러 번 가게 되니까 한번 장례가 나면 바쁜데 당시에는 교역자님들이 시신을 염을 하고 수의를 입히고 모든 뒷치다거리를 다 했던 그 시간에도 그렇게 많은 영혼들을 섬기고 지금보다 훨씬 더 기도를 많이 했던 모습이 떠올라서 은혜의 추억의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