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서서평선교사님”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sabeth J. Shepping 1880-1934)는 조선에서 22년을 살며 수많은 전도부인을 양육했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며 간호사를 길러냈습니다. 그 짧은 생애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가 뿌린 씨앗과 생명력 이 물댄 동산같이 이 땅을 풍요롭게 적시고 있습니다. 온누리 교회 CGN TV 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54 년밖에 살지 않았으면서 조선에서 풍토병이 걸려서 세상을 떠나면서도 자신의 장기와 시신을 기증하고 마지막 있는 것 모두 주고 떠난 작은 예수의 모형인 그분을 다큐먼터리로 만들어서 영화로 보여주기 시작하여 어제 개봉을 했습니다. 책을 열심히 읽어서 배운 서서평선교사님의 삶이지만 더 배워야 하는 마음으로 어제 밤에 남편과 같이 영화관으로 가서 감동을 다시 느끼며 눈물 겨웁도록 보여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자 그 교회에서는 기자들이 많이 취재하러 올것으로 생각하고 기자석을 많이 만들었는데 거의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자리가 설렁하게 비었다고 합니다. 한데 서서평 선교사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에 동아일보 같은 신문에 그분의 삶이 기사로 났습니다. 그것은 삶으로 예수님의 닮은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100 주년 기념 행사에 조선일보에 난 내용입니다.
“조선 땅에 몸던진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년
전라도·제주 병자 돌본 간호 선교사 - 광주서 과로·영양실조 숨졌을때 담요 반장·강냉이가루 2홉만 남겨
아이 14명 입양, 과부 38명 돌봐줘… 총독부 나환자 정관수술도 막아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 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 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서서평 선교사 기념사업 경과 보고를 하던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양국주(63)
대표가 울먹였다.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 예배 및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의 미국인
서서평 은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독신여성
간호 선교사.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을 이끌고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순회하며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수많은 '큰년' '작은년'에게 이름을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 여행을 나서면 말을 타고 한 달 이상 270㎞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야 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명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할머니' '큰년' '작은년'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서평 선교사는 어린 시절 가난하고 초라하나 행색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서평은 간호학교 재학시절,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며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는데 이 일로 어머니와 결별을 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책에서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부분이 다큐먼터리 영화에서는 보여주었는데 참 복음의 놀라움을 다시 감탄했습니다. 독일은 지금도 손으로 기록한 출생 기록이 100 년도 넘는 일인데
그대로 있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어머니는 하녀 출신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미혼모로서 아마 강간을 당하여서 병원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집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엄마는 할머니께 맡기고 미국으로 이민가서 정말 슬픈 유아시절을 보냈습니다. 독일에서
출생한 서서평선교사님은 미혼모의 자녀로 독일 사람이 당시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맨 앞줄에는 대농의 자녀가 앉고, 그
다음줄에는 보통, 그 다음줄에는 작은 농사짓는 사람, 넷째줄에는
그외에 자녀로서 학교에서도 등급이 달르게 대우를 했다고 합니다. 서서평선교사님은 맨 뒷줄에 앉았을것이고 그런 가운데서 엄마가 없는 아이라고
아이들은 놀렸습니다. 슬픔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자기를 돌봐주던 할머니는 돌아가셔서 12 살에 혼자 이민자로서 엄마를 찾아갔는데 그후 엄마는 천주교 신자였다가 딸이 개신교로 바꾸고 선교사로 간다고
하여 다시 내쫓았습니다.
그후 선교사로 조선에서 일을 하다가 안식년을 맞이해서 미국에 엄마를 찾아갔을 때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은 딸을 보고 거지꼴을 하고 나타났다고 문을 꽝 닫아버리고 다시 버림을 받았습니다. 한데 이런 세번의 상처는 조선에서 버림받은 고아들을 더 품어줄수 있는 사랑의 메센저가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늘 “상처 상처” 하면서 상처타령만 하는 데 선교사님은 자신의 고통으로 남의 고통을 더 이해하며 그들을 품어주니 이것이 복음의 위대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힘겹고 끈질긴 투병생활 가운데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찾아일했습니다. 특히 서평은 질고가 많았던 조선 여성들의 누추한 삶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소박맞은 여성들, 첩이 되거나 몸을 팔아야 생존을 이어가던 여성들, 고단한 민초들의 눈물겨운 삶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조선 최초 여자 신학교인 이일학교를 세워 까막눈 쳐녀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일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술까지 알려 주었는데, 이 학교는 수많은 전도부인을 양성함으로 호남지역 교회 학장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의 전위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