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태영박사님의 신앙 승리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수 있다”(1)
어린 시절 나는 먹을 것이 없어 두어달,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한톨도 입에 넣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그런 때면 산에 가서 소 나무 속껍질을 벗겨다가 삶아서 먹고, 도토리도 다다 먹고, 칡뿌리도 캐 먹고, 솔잎과 쑥 같은 것을 뜯어다 먹었다. 때론 아침도 고구마, 점심도 고구마, 저녁도 고구마, 오늘도 고구마, 내일도 고구마 하며 고구마만 먹기도 했다.
그렇게 가난하던 초등학교 5 학년 때 나는 어머니 손에 잡혀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볏짚으로 만든 쌀가마니를 땅바닥에 깔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다. 어른들이 20 여명, 아이들이 20 여명 정도되는 교 회에서 그곳 전도사님으로부터 신앙의 씨앗 세가지가 내 어린 마음에 뿌려졌다.
첫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둘째, 그 하나님이 우리가 아닌 “나 류태영”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셋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커뮤티게이션을 할수 있다는 사실
어린 시절 내 마음에 뿌려진 이 세가지 씨앗은 일평생 신앙의 뿌리가 되었고 나를 키워준 원동력이 되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다. 365 일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기도를 다니셨는데 나도 초등학교 5 학년 때부터 새벽기도를 따라다녔다. 그때부터 시작된 새벽기도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신앙이 내게 용기와 희망과 소망을 주고 어떤 어려운 현실과 상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넘쳐나게 해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가는 곳이라 나는 당연히 갈 염두고 못내고 지게를 지고 산으로 들로 일하러 다녔다. 나의 집 마당, 남의 밭, 남의 논에가서 일하고, 남의 돼지 먹이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오는데 초등하교 때 반장도 못해보고 우등상도 못 타고 개근상도 못 타본 아이가 중학교 모자를 쓰고 고향에 들르는 모습을 보면서 엉엉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재들은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개근상도 못 탔는데 중학교를 다니고, 나는 이렇게 지게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남의 집 일을 하고 지내야하나요? 나도 공부하고 싶어요.” 그때 나는 내 일생을 통해서 할수 있는 한 끝까지 공부를 하겠다는 꿈을 갖게 됬다. 공부를 많이 해서 배움으로 힘을 얻어 가난한 농촌을 위해서 살겠다고 서원 기도를 했다. 나처럼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농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보며 우리 농민들이 가난이란 소굴에 갇혀 있는 노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농민들을 가난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싶었다. “반드시 이들을 해방 시켜야 한다.”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린 시절 꾸었던 이 꿈은 훗날 아무리 절망적이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꿈을 가지니 희망이 생기게 되면서 현실의 상황과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장 집 모퉁이에 토키를 몇 마리 키우기 시작했다. 다 기른 토끼 몇 마리를 망태기에 넣어가지고 시골 장날 내다 팔아 “중학교 강의록”이라는 책을 샀다. 중학교에 못간 사람이 집에서 공부하는 책이었다. 그걸 가지고 3 년 동안 죽어라 독학을 했다. 이 사실이 동네에 소문이 났고, 열여덟 살 되던 해에 내 소문을 듣고 감동을 한 임실교회 엄병학 장로님께서 나를 테스트 한후 그 집 여덟살, 열살짜리 두 남매의 가정교사로 채용해 주셨다. 그 집에서 먹고 자면서 열 여덞 살에 중학교를 다니게 된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했으나 당시 임실에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차비를 마련해달라고 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무작정 올라왔고 마침 여름이라 거리에서도 자고 기차역에서도 잤다. 미군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야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미군 부대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중 유학을 간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학이라는 단어를 일생 처음 들었다. 유학이 뭐냐고 했더니 영국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의 훌륭한 대학에 가서 세계적인 교수한테 공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부를 끝까지 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했으니 나도 그때부터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류달영박사께서 쓰신 “새 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에서 덴마크의 가난한 농촌이 세계적인 복지국가가 되는 과정을 읽고 덴마크로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됬다. 그곳에서 가난한 농촌이 어떻게 잘사는 복지국가가 되었는지 배워 우리나라의 가난한 농촌을 살려보겠다고 결심했다.
꿈은 원대했지만 내 현실은 아사 직전이었다. 구두닦이 해서 번돈으로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한 달에 한번씩 등록금을 내려니 당연히 굶는 날이 많았다. 하도 많이 굻어서 빈혈이 심해 학교에 가다가도 여러 번 쓰려졌다. 아스팔트 길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고 어질어질해서 한참을 전봇대를 붙들고 있다가 가기도 했다. 그러다 아예 잔디밭에 드러누우면 1 천 미터, 2 천 미터 가라앉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은 영양실조에 걸려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이런 경험들을 숱하게 했다. 구두닦이만 해서는 안되니까, 쓰레기를 주워다 팔기도 하고, 못이나 쇳조각도 모아다 팔기도 하고, 방학 동안에는 행상도 했다.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 힘겹게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도 야간대학을 갔다. 대학을 가려면 저축을 해야하는데 저축하려면 먹는 것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너무 배가 고프던 어느 날 쓰레기통에 밥 버려진 것이 눈에 띠었다. 더럽다는 생각도, 남들이 보면 어쩔까 하는 생각도 안들었다. 얼른 집어 들고 연탄재와 먼지 묻은 것을 털어내고 먹었다. 또 어떤 날은 빵이 상자에 버려진 것이 눈에 띄어 집어 들었다. 빵엔 이미 곰팔이가 잔뜩 피어 있었지만, 곰팡이가 많이 핀 부분을 잘라내고 먹기도 했다. 대학교 때 공장 청소부로 들어가 오후 4 시까지 언 손을 녹여가며 걸레질을 하고 겨우 연명했는데 그것도 나중에 공장이 부도가 나서 문을 닫는 바람에 월급도 못받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적도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덴마크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던 것을 어떻게 이룰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농촌에 대한 눈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농촌의 현실을 살펴보고 어떻게 발전해야 할것인가에 관한 논문을 써서 자기 소개서와 함께 덴마트로 보내기로 했다. 두달이 걸려 논문과 자기 소개서를 영어로 번역했는데 지도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니 관계대명사, 전치사 등이 잘못 쓰인 실수투성이 영어문장이 많았다.
나름대로 서류를 준비했는데 이것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고심거리가 생길때마다 기도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 마음에 응답을 주신다. 새벽기도를 드리던 중이었다. “덴마크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디다 보내야 할까요?” 고심하여 기도하던 중 마음에 응답이 왔다. “그렇지, 내가 아무도 모를 바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한테 보내야지.”
도서관에 가서 대백과사전을 들여다보니 덴마크의 가장 높은 사람은 왕이고, 왕의 이름은 프래드릭 9 세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모조지를 구해서 봉투를 만들어 논문과 편지를 다 넣고 왼쪽 위에다 보내는 사람에 내 이름을 쓰고 받는 사람 쓰는 데에는 “To, 프래드릭 9 세 임금님 귀하” 이렇게 썼다. 그런데 주소를 알수가 없었다. 그 이튿날 다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일 높은 사람한테 보내려고 이름을 알았는데 백과사전을 아무리 봐도 주소가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걱정 말아라, 그 나라 편지 배달부가 임금님이 어디 사는지 모르겠냐?” 라고 대답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지 임금님은 그 나라 서울인 코펜하겐에 살겠지”
그래서 봉투에 코펜하겐 덴마크라고 썼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말로 하면, “대통령, 서울, 대한민국”으로 수신인을 한것이다. 20 여일 후쯤 기적 같은 회답이 왔다. 덴마크 왕궁 사무실에서 온 것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전달이 된것이다. “왕께서 당신의 편지를 읽으시고 감동이 되어, 당신의 뜻을 이루어주도록 행정부에 지시했습니다.” 얼마 있으니까 덴마크 외무성 차관보가 사인한 정식 초청 편지가 또 도착했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현실적으로 보면 한 대목 한대목이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다. 꽃머슴이었던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가고 유학을 가는 것이 전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덴마크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갈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할수 있다” 이 말은 다단계 회사에서 외치는 단체 구호가 절대 아니다. 내가 70 평생 삶에서 얻은 진한 체험이자 고백이다. 나는 알다시피 배경이 좋은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명문대 출신도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합친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신약성경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말씀이다. 바로 이 말씀과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어떤 곤경도 이겨낼 힘과 능력과 에너지가 되고 방패가 되어 주었다. 앞이 꽉 막혀 깜깜하고 어려운 상태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난 반드시 할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현실에 최선을 다할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 말씀때문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꿈이 있으면 신념이 생긴다. 그리고 “하면 된다, 할수 있다” 는 신념을 갖고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보면 누구에게나 길은 열리게 되어 있다. 그렇다. 꿈과 믿음이 있는 한 불가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