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모든 도로는 비단길”
한 달에 한번 교도소에 가는 길에 우리는 봉고차를 타고 갑니다. 1000 키로를 두 군데 교도소에 갈 때는 15 시간 한군데 갈 때는 12 시간이 걸립니다. 장흥교도소도 광주 교도소도 바로 산밑에 위치하고 있는데 포장이 안된 도로가 없습니다. 어제도 교도소를 가는데 사람들은 가끔 질문들을 합니다. “장시간 봉고차를 타고 갔다 오면 피곤하지 않으세요? 힘들어서 어떻게 몇 년동안 계속 그렇게 할 수 있지요?” 윤권사님도 나도 한국에 모든 길은 비단길이고 사랑스런 얼굴을 보기에 기쁨으로 다녀올 수 있습니다.
전에 몽골에서 한국에 공항에 바로 내린 몽골 형제가 공항에서 차를 타고 가면서 한국의 도로는 유리 같다고 감탄을 했습니다. 몽골 공항 근처도 포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데 네팔에 비하면 몽골은 너무나 더 좋게 되어 있습니다. 네팔은 수도 카투만두에 거리에 신호등을 몇 개 보지 못했고 비포장 도로에 질주하는 오토바이 행렬과 한국에 폐 차장에서 보는 차가 더 좋을 것 같은 차들이 질주하기에 아찔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네팔을 다녀온 후 한국에 모든 도로는 비단길이고 우리가 타는 봉고차도 벤즈 차 같다고 윤권사님과 이야기 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행적을 보면 말을 타고 가는 위험한 길들과 비교하면 우리의 가는 길은 그저 즐거운 소풍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웨슬리의 행적과 비교를 해 봅니다.
웨슬리의 행적: 새벽 4 시 조금 넘어서 말타고 떠나 2 시경에 쉬루스베리에서 42.3 마일 떨어진 란니드로우스의 장터에서 설교하고 다시 그곳에서 떠나 산을 넘어 화운틴헤드로 갔다. 거기서 묵으려 했으나 B씨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람에 7 시가 넘었는데도 다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처음 출발할 때 방향을 잘못 잡아 전혀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한 시간 후에야 알아차렸다. 넓은 지역을 몇 개 넘어야 한다고 들었으나 조그만 습지를 지나니 더 이상 길이 있지 않았다. 다행이 가든 길에 조그만 집이 있어 들어보니 집 주인은 친절하게 자기 말을 타고 우리들의 앞장을 서서 언덕을 넘어 큰 길까지 안내해 주면서 그 길만 따라 가면 곧 장 로즈페어로 갈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 길을 따라 가다가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아니예요, 이길은 에버리스튀드로 가는 길입니다. 로즈페어로 가시려면 되돌아가서 저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하고 일러 주었다. 다리 근처에 이르러 조그만 집이 있어 주인이 다음 마을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으나 또다시 방향을 잘못 잡은 바람에 또 한 차례 헛수고하였다. 그때는 9 시가 넘었다. 1 시간 가량 산속에서 바위와 늪과 절벽 가운데서 헤매다가 간신이 다리 근처에 있는 오두막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곳에서 쉬려고 했으나 술 취한 광부들이 소란을 피우는 통에 쉴 수가 없었고 거기다가 침대라고는 하나밖에 없었고 말이 먹을 수 있는 풀도, 건초도, 옥수수도 없었다. 광부들 중에서 한 명을 안내자로 고용해서 로즈페어로 떠났으나, 그는 대단히 취해 있었다. 새냇물을 건너다 물에 빠지면서 서서히 제 정신이 들기 시작하였다. 12 시가 다 되어서야 여관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말을 줄 건초를 구할 수 없었다.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 마부와 광부는 우리 짐승들을 타보기 원했던 것 같다. 우리가 일어나기 조금 전에 짐승들을 우리 안으로 집어 넣었음에 틀림 없었다. 노새는 여러 군데 찢겨져 있었고 내 말도 엉덩이가 예리한 갈고리에 찔린 듯하고 등에 난 상처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다. 우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7 월 31 일 – 글라모겟셔를 향해 떠났다. 5 시간 동안 깍아 지른 듯한 암벽과 산을 오느내려 란드페판 나루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물로 들어가기 전에 진흙구덩이에 빠져 고생하였다. 2 시가 돼서야 키드웰리에 도착하였다. 그 동안 말 등에만 7 시간 있었던 셈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카마텐으로 돌아서 왔더라면 짐승도 사람도 좀더 편히 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후로는 다시 이 나루터들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곳으로 건넌다 해도 설혹 무사기 건넌다 해도 별로 시간이 절약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갖은 위험과 고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키드웰리에서 친절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모래톱을 건너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고 일러주어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10 분도 채 못 가 한 사람이 우리를 따라와 앞장 서서 갔다. 그는 모래톱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틀림없이 모래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적어도 10 마일은 될 모래톱에 간간히 유사까지 휘몰아치고 있었다.
7 시에 설교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진지하게 들었기에 여기까지 온 수고가 헛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위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