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선교를 하면서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보내면서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냥 말로 조금 전도하거나 전도지를 뿌리는 것이 아니고 한 영혼에게 그 영혼이 얼마나 사랑 받는 존재인가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전향되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선교는 “사명이다” 선교는 “희생이다” 이런 고백을 하는 것에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을 바쳐서 주님만이 희생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주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우리 앞장서서 주님이 하시는 것을 보는 즐거움은 넘치는 기쁨으로 우리가 한 어떤 수고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주베키스탄에서 대장암 수술을 세번이나 하고 제대로 되지 않아서 절망적인 얼굴을 가지고 몸도 고통스러워 하면서 이사를 한 우리 선교회를 찾아온 이걸씨는 암센터에서 수술받고 퇴원하고 두주 반이 지났는데 웃으면서 지난주일 예배에 나타났습니다. 세번 버스를 갈아타고 오다 보니 늦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웃으면서 병원에서 있을 때처럼 항상 감사하고 성경책 열심히 읽으면서 신앙을 잘 지켜야 다시 암이 재발하지 않는다고 하니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영혼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아버지께서 들으시고 친히 개입하시는 것을 보면서 마치 관중이 되어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구경하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직접 행하시기에 우리는 다른 곳에 찾아 다니며 구걸선교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삼십대에 출석하던 중앙성결교회에 미국 선교사님이 하루는 주일 예배에 오셔서 선교의 중요성을 설교하셨습니다. 그날 설교를 마치고 “선교는 직접 가던지 후원을 하여서 보내던지 둘 중에 하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접 가기를 원하시는 분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일어난 사람들이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선교사님은 이어서 “후원으로 선교사를 보내기를 원하시는 분도 일어나십시오” 그날 물었습니다. 나는 그날 두번 다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약속을 한대로 홍콩으로 말레이시아로 가게 하셨고 그러면서 동시에 계속 후원을 하는 일도 동시에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복음을 들고 가는데 마다 사람들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고 생명을 찾는 것을 보는 것은 주님의 증인이 된 사람의 기쁨이었습니다.
사랑은 또 하나의 사랑을 낳는데 전에 양화진 이야기와 초대교회사를 읽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선교사님들에게 사랑의 빚진자로 우리도 제 3 세계에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은 또 사랑의 열매의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책에 실린 이야기 입니다.
전라도 광주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세례 받은 사람, 광주 교회의 최초 장로, 광주 출신 최초 목사, 3.1 운동 때 광주 만세 시위를 지도하였을 뿐 아니라 직접 서울에 올라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부르다 체포 되어 2 년 6 개월간 옥고를 치른 민족운동가, 별세하였을 때 광주뿐 아니라 전국에서 한센환자, 결핵환자, 걸인 수백 명이 몰려와 ‘아버지가 가시면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줍니까’라고 울면서 상여를 끌었던 전설적인 광주 서교의 아버지 최홍종 목사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최홍종이 처음부터 이런 성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 믿기 전 그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왈패’였다. 욱하는 성질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던 인물이었다.
1904 년 광주에 선교사가 처음 들어와 양림동 언덕, 어린애가 죽으면 갖다 버리던 ‘애장터’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이 두려워 하며 가까이 하지 않을 때 예의 욱하는 성질에 “도대체 어떤 족속인지 알아나 보자’ 하는 생각에서 양림동 선교사 집을 찾아갔던 그였다. 그러했기에 처음부터 기독교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교사 일을 도와주며 돈도 벌고 출세 길도 모색해 보려는 생각에서 선교사 동네를 출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5 년 세월이 흘러 1909 년 4 월, 광주 선교 개척자 오웬이 지방 전도를 나갔다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해맸다. 선교사들은 급히 목포에 있던 의료 선교사 포사이드 에게 연락하여 광주로 올라오도록 하였다. 포사이드는 배를 타고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 나주 영산포에 내렸다. 선교사들의 부탁으로 영산포까지 마중 나간 최홍중은 말을 탄 포사이드를 안내하여 광주로 향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구걸하는 걸인을 만났다. 그냥 걸인이 아니라 한센병에 걸려 걷지도 못하는 여자였다. 최홍종은 무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러나 포사이드는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그 걸인에게 가더니 그를 안아 자기 말에 태우고는 자신은 고삐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뒤따라가는 최홍종에게 포사이드의 그런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포사이드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오웬 선교사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고 포사이드는 길에서 만난 한센환자를 선교부 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먼저 들었던 환자들이 ‘어떻게 한센환자와 함께 지낼수 있느냐?’며 격렬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환자를 아무도 쓰지 않는 가마 굴로 옮겼다. 이 모든 과정에서 포사이드는 직접 환자를 안아 옮겼다. 최홍종은 멀찍이 서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런데 옮기던 중, 환자가 손에 쥔 지팡이를 놓쳤다. 환자가 그 지팡이를 다시 잡으려 하지 두 손으로 환자를 안고 있던 포사이드가 최홍종에게 외쳤다.
“미스터 최, 그 지팡이 좀 집어줘요” 그러나 최홍종은 지팡이를 잡을 수 없었다. ‘미스터 최 잡아도 괜찮아요 어서 집어 줘요.’ 그러나 그날 최홍종은 끝내 지팡이를 잡지 못했다. 그 대신 그날 밤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왜 그는 하는데 나는 하지 못하였는가? 나는 내 동족인데도 피해 도망쳤는데 어떻게 그는 자기 자식 대하듯 안을 수 있었나? 그와 나 사이에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 믿음의 차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그 후 최홍종은 ‘예수 애양원’의 출발을 하게 되어 ‘한센환자의 아버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델을 보고 따라 하는 또 하나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선교는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닌지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이 선교를 통해서 보는 기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