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참사를 보면서 아펜젤러선교사님이 기억납니다.
세월호의 보도를 보면서 문득 잊어버렸던 아펜젤러선교사님이 한국인을 살리려고 하다가 순교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기에 아펱젤러 105 주년 이 된 기념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담임 목사님 임춘희목사님이 쓰신 글을 퍼왔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 없이 한국 감리교회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이 땅 위에서 행한 많은 수고와 땀, 그리고 이 땅 백성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감리교회는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수많은 학교를 세웠고 수많은 인물을 길러내었습니다. 수많은 병원과 봉사기관을 세웠고,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복음의 열매는
결코 우연하게 열린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국인을 위해 자신을 삶을 한 알의 밀알로
바친 아펜젤러의 순교자적인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젊음과 모든 힘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바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자주 기억하지 못했고, 우리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둡던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린 아펜젤러선교사가
없었다면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아펜젤러선교사가 평소에 외치던 말이 있었습니다.
‘선교는 순교다.’ 그의 말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선박사고현장에서의 아펜젤러는 수영도 잘하고 탈출이 용이한 1등석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되었습니다. 생존자 보울비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3등실에 있던 한국인 조수 조한규와 이화학당의 여학생을 구하러 내려갔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아펜젤러의 마지막 모습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15:12)의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와 기념관을 건립하고, 그 신앙의 모습을 본보기를 삼으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120여 년 전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순교한 아펜젤러선교사의 뜨거운 복음의 열정과 순교정신을 기념하고 그의 믿음을 계승하기 위함입니다.
순교현장에서 순교의 정신을 확인하고 그 숭고한 삶을 기리는 것, 그리고 그 현장을 직접 발로 밟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며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뜨겁게 타오르도록 만드는 일이겠습니까?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순교의 영성을 본받아 교회마다 나아갈 길과 담당할 사명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소개되어 있는 글과 아울러 “아름다운 사람 – 아펜젤러” 라고 소개한 내용을 읽으면서 우리도 복음의 빚, 사랑의 빚을 갚는 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3일 자신의 집에서 두 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인 배재학당의 시작이다. 1887년 2월 고종이 “유능한 인재를 양육하는 집”이란 뜻의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교명을 하사하였으며, 9월 한국 최초의 르네상스식 건축물인 본관을 신축하였다. 한국 근대기에 있어 개화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고, 민족의 수난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하며 기독교학교의 대표적 소임을 다해왔다
아펜젤러는 한국인들에게 성경공부도 시키고 예배도 드리기 위해 정동에 위치한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이곳을 ‘벧엘예배당’이라 이름 지었다. 1887년 10월 9일 이곳에서 첫예배를 드림으로 한국 감리교회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옆 사진은 한국 최초의 고딕식 예배당으로서 1895년 8월 7일 착공하여 1897년 12월 26일 성탄주일에 봉헌하였다.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아펜젤러는 우선 성경번역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선교한 지 두 해가 지난 1887년에 서울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들이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성서번역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후 1893년에 상임성서실행위원회로 조직을 개편하고 그 밑에 성서번역자회를 두어 체계적인 번역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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