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결과는 계신할 수가 없다
보리떡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지금 시가로 계산하면 얼마짜리 점심일까요? 가장 싼 점심값으로 계산한다면 요즈음은 5000 원짜리 식사가 거의 없고 7000 원이라고 계산할 때 남은 열두바구니 외에 7000 원씩 일인당 계산을 하여 오쳔명이라고 할 때 35,000,000 원으로 계산이 됩니다. 그 점심을 자신이 먹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앞에 드린 소년은 오천명을 먹이시고도 열두바구니를 남게 하신 능력앞에 매도되어 그날 밤 흥분되어 잠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소년은 다음에 그런 기회가 있을 때 또 서슴없이 드렸을까요? 아니면 망설였을까요?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그 소년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늘 기쁘게 보고 싶었기에 순종을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희 아이들이 아직 어린 나이였을 때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나누워서 학자금을 지불한다고 보험을 들어달라고 아는 분이 부탁을 했습니다. 저가 생각할 때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닐 때 학자금을 지불해 주면 그때 가서 학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7 년동안그 보험금을 납부하며 저금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가지고 있던 것이 쌀 밖에 없었을 때 쌀을 가져다 주라고 하시고 가스 통 교제 할 돈 밖에 없을 때 그 돈을 나누라고 하시던 아버지께서 학자금을 준비한 돈을 한 개척교회에 전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교회는 아주 적은 교인들로 구성원이며 건물 한 층을 분양 받아서 매달 그 분양금을 지불하면서 힘들어 하는데 다달이 그 돈을 지불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 소속이 아니고 다른 교회에 소속이었으며 새벽기도만 그곳에 갔는데 아버지께서 그런 마음을 주시는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돈은 전혀 없고 남편에게 받아야만 하는데 가지고 있는 그 돈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감정으로 생긴 것인가 라고 의구심이 생겨서 그 다음날 또 기도를 하는데 같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 새벽기도를 간지 기간이 얼마 안된 상태였고 그 교회에 누구와도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면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순종을 했습니다. 처음 좀 망설였지만 아버지께서 그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저도 7000 원짜리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35,000,000이 계속 되어지는 것을 일생동안 보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한번 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고 매일 지금까지 생겼던 인생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아버지께서 수시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가져 오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계속 순종을 했고 그 심을 것은 아버지께서 끊임없이 공급을 하셨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쉼터를 운영하며 그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며 수백명의 병원비를 지불하고 해외 여섯나라에 교회를 세울수 있었으며 계속 지금도 지원을 하고 있고 23 명의 외국인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할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양화진에 갔습니다. 그곳에 잠들어 있는 하나님이 쓰셨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 하나 묘비에 쓰여 있는 글을 읽으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분들이 한국에 왔을 때는 지금과 같은 조국의 모습이 전혀 아닙니다. 병원이 없고 학교가 없고 우리는 주권도 일본에 빼앗기고 그런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왔고 이땅에 그들의 뼈를 묻었고 삶을 주었던 분들입니다. 그 가운데 시신을 찾지 못하고 성경번역을 하러 목포에 갔던 아펜셀러는 풍랑을 만나 천국으로 옮겼는데 그 아들은 대를 이어서 이 민족을 사랑하며 배제학당을 세웠습니다. 이화학당도 선교사의 손으로 세워진 학교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때 그 믿음의 선배들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학교까지 짓지를 못한디 해도 외국인 신학생들을 열 명은 가르칠 수 있어야 사랑의 빚을 갚을 것을 생각하며 인도하심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언제나 풍성하시기에 지금까지 십년동안 23 명을 보내주셨습니다. 2013 년 2 월까지 신대원 및 학부를 17 명을 졸업시켰고 현재 6 명이 남아있습니다.
한국에 일반 가정에서 한명의 대학을 시키는 것도 결코 만만치 않은 액수인데 그렇게 많은 학생들을 공부시키도록 하나님께서는 청지기로 사용하는 손길을 통하여 하신 것입니다.
1991 년 400 명 중에 한명 다시 같은 은행에서 채용을 할 때 3 년의 계약을 하고 재 채용이 되었습니다. 그 은행에서 계약직 외에도 해외 근무하는 사람은 평균 삼년이 되면 자리가 이동이 되는데 우리는 계약을 3 년을 했기에 3 년이 되던 해는 우리 아들이 고등학교 2 학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기에 고2 때 하나님께서 다시 인도하지 않으시면 대학 가는데 문제가 생기고 딸은 중 2 여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우리와 함께 가셔야만 저의 선교를 계속 할 수가 있었습니다. 3 년이 끝나기 전 아버지께 기도를 하니 아버지께서는 그 은행의 3 년 평균 근무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우리가 홍콩에 게속 있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뉴욕으로 근무처를 가던지 선택을 할수 있게 인도하셨습니다. 남편은 아들이 교2 에 옮기는 것이 좋지 않게 판단해서 그냥 홍콩 국제 학교를 마치도록 홍콩을 선택했습니다. 저가 그렇게 염려하던 고등학교 중간에 옮기는 일은 없고 졸업을 한 다음날 그곳을 떠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2 년 년장 근무를 마치자 다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업을 주신 곳은 같은 은행에 말레이시아 지점이고 홍콩에서는 감사직이었는데 말레이시아에서는 여신담당으로 다시 3 년의 계약을 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직책은 영업이 잘 되면 특별 보너스를 받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직책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말레이시아에서 선교를 하였고 남편은 일을 해서 선교 후원을 해 주었는데 IMF 가 터지는 일도 있었고 저가 잡혀서 추방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일에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씀을 늘 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에 처음 갔을 때 월급을 말레이시아 돈으로 받던지 미국 달러로 받던지 선택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말레이시아 링깃이 강세라서 남편은 말레이시아 링깃을 선택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IMF 가 터지면서 말레이시아 링깃이 떨어져서 45% 정도 떨어지니 월급이 그만큼 떨어진 것과 같은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저는 말레이시아 말을 배워 성경공부 교재를 그 나라언어로 번역하여 3000 권을 인쇄하여 그 나라 교회에 기증을 하여 그 교회에서 그 책을 팔아 무슬림 나라에서 건물도 없는곳에 건축헌금을 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다면 그 결과가 우리 자녀들은 공부할 돈도 없고 공부를 못 맞쳤을까요? 아들이 대학을 들어갔을 때 미국에서 한국에서 IMF 때문에 수 많은 유학생이 귀국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탈세하거나 거짓된 방법이 아닌 정직하고 하나님 주신것으로만도 결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신다고 한 것을 언제나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말레이시아 미국은행이 건립한지 30 년만에 최고의 영업실적을 올리도록 하나님은 인도하셔서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순종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삼년 계약이 끝나자 우리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맡게 되었고 미국으로 대학을 진학하였고 십여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IMF 가 터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녀가 둘이 함께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되어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우리는 한국에 와서 홀리네이션스 선교회를 시작하였기에 더 많은 선교비가 필요했습니다.
한국의 경기는 아주 좋지 않던 그 시간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레이시아에 3 년의 계약을 그렇게 은혜가운데 마치게 하시고 이미 퇴직금을 타고 더난 한국 지점에 자리를 기적적으로 만 드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