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기(4)
모성애
차를 타고 길을 지나가는데 한 공사장에서 여인들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인은 돌을 담는 큰 나무로 된 통을 짋어지고 섰고 두 여인은 양쪽에서 삽집을 하며 돌을 퍼서 담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길을 지나가는 여인들이 큰 자루에 무거운 것을 짋어지고 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은 지금도 가슴 깊이 박혀 있습니다.
한국에 약 10 년 전쯤인가 용산에 있는 전쟁 기념관에서 전시를 한것을 보러 간적이 있습니다. 전에 한국의 모습이 그곳에 전시 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어머니”라는 주제의 책도 많이 있고 한국의 어머니는 비릴 우산을 쓰고 애기를 업고 장사를 하고 머리에는 무거운것을 이고 가다가 애기가 배고파 울면 길에서도 수유를 하는 장면입니다. 전에 6.25 전쟁때 미군이 쓴 글에 폭격이 심하게 되자 엄마는 아기를 자신의 몸으로 가리고 아기는 살게 하고 자신은 대신 폭격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대단한 모성애의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장면은 네팔에서 다시 재연해 보는것 같았습니다.
그 장면을 두고 두고 생각하면서 가난하고 무언가 더 편리해 지지 않을때 모성애는 더 강하고 여인들은 더 열심히 살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전에는 다리미도 없기에 그렇게 종일 일하고 밤에는 두 개의 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는 소리에 조선회상에서 쓴 글을 읽어보면 상당히 그 소리가 요란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아서 키울 때만 해도 한국에는 더운물 찬물이 나오는 곳이 많지 않기에 부엌에서 물을 대워서 방으로 들고 들어가서 아기를 씻기고 다시 그 물을 퍼서 부엌으로 갔다 버리고 하여도 모두 강건하게 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직장을 다니는 엄마 들 외에도 조금만 아이가 크면 “어린이집”이라는 신종 단어가 걸린곳이 웨이팅 리스트라고 하니.....그리고 낮에 식당이나 쇼핑몰에 거의다를 차지하는 손님은 여성들입니다. 그런 광경을 보다가 네팔의 강인한 엄마들을 보니 한편 안쓰럽지만 다른 한편은 만감이 교차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생필픔
한국에 크리넥스가 보급되고 화장실에서 쓰는 두루마리 화장지가 일반화 된 것도 70 년 중반이 지나서 였던것 같습니다. 저는 유한양행에 근무하였고 유한양행과 킴버리 회사가 합작하여 유한 킴버리 회사에서 그런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전에는 한국에서 수세식 화장실도 아닌것은 물론이고 무엇을 사용하였는가 하면 신문지를 사용하거나 하루에 한 장씩 뜯는 달력은 아주 얇아서 최고의 좋은 화장실 휴지였습니다.
그러던 조국이 화장지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생필품이 선진국으로 바뀐것은 시간상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그렇게 물 사정이 좋지 않은곳에서 와서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 것만 보아도 좋아 보이기에 모두 그냥 마십니다. 우리 쉼터에는 정수기를 설치했지만 공장에는 거의다 그냥 마십니다. 우리가 공장으로 전도나갈 때 그들에게 물을 끓여 먹으라고 하면 이상한 듯이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놀랍게 한국을 축복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깊게 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구제를 받던 나라였는데 짧은 시간에 주는 나라로 바뀌어서 교육부 장학금을 160 개 나라에서 100 명을 선발하여 전액 장학금을 주고 외국인들을 한국대학교에 초청하여 방글라데시에 조아식도 그중에 한명으로 온 것입니다.
먼저 복을 그렇게 받을수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라고 생각해 보며 “손양원목사님” 같은 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할 수 있는 순교자들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다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그런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희생이 오늘의 한국을 가져 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놀라운 축복을 주셨고 수많은 제 삼세계 만나볼 기회도 없는 외국인들이 한국에 보내졌을까? 한번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양화진에 묻힌 수 많은 선교사들의 빚을 우리도 제 삼세계에서 온 귀한 영혼들에게 갚아야 할 시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