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여행기 (2)
**너희도 애굽땅에서 거류민이 되었느니라
레19:33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레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네팔에 젊은 청년들이 가슴 왼쪽에 태극기 마크가 달린 잠바를 입고 빨간 색 모자를 쓰고 단체로 250 명이 비행기를 타는 것을 보고 우리 대학 출신들이 독일에 광부로 갔고 보조 간호사 역할을 하던 시간들울 샹걱해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동에 직업을 찾아 갔던 시간이 불과 40 년 사이에 있었던 일인것을 기억했습니다. 독일에 광부로 갔던 분이 슨 수기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땅속에 들어가는 깊이가 너무나 깊어서 만약 자신의 부모가 그곳의 현장에 보았더라면 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는 그 상황을 자세히 쓴 내용이었습니다. 보조간호사로 갔던 분은 그곳 사람들이 기피하는 시체를 닦는 일이라든지 그런 일을 한 이야기를 저의 동창중에 한명도 그런 일을 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운 중동지방에 갔을 때도 한국에 직업을 가질 수가 없던 가장들이 집 한 채를 장만한다고 갔는데 아내는 다른 불륜의 관계로 사라지고 돈도 없어지고 해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킨것을 우리 결혼초에 바로 우리 옆집 앞집에서 일어났던 일이라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대한민국이 어떻게 경제발전을 하여 노동자를 받는 나라로 바뀌었을까? 라는 생각은 이미 외국인 노종자 선교회를 시작하면서 계속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도 애굽땅에서 거류민이 되었느니라.” 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과거를 다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한국 속담에 개구리가 올챙잇적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해줍니다.
네팔은 물이 너무 귀해서 참으로 고통을 당하고 전기도 귀하기에 저녁이면 나가는 곳이 너무나 많아서 밖에 컴컴합니다. 그런 시간에 초를 사용하여 어둠을 밝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신문에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를 전 세계 인구를 통계내어서 그런 전기제품을 소유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통계였습니다. 네팔에서는 전기가 나갔다 들어왔다 하니까 냉장고에 온도가 한국과 같지 않습니다. 찬 시원한 물을 마셔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이니 세탁기는 물론 사지도 못하겠지만 있다고 한들 세탁기를 쓰는 상황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지하수가 때로는 나오지 않아서 아주 오랫동안 샤워도 할 수가 없는데 하루는 길거리 가운데 커다란 우물을 열명도 더 둘어서서 물을 길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우물 안을 들여다 보니 깊은 우물 속에 바닥에 아주 조금 우물이 있는데 여인들이 나와서 물을 길고 있었습니다.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모든 문명이 강을 끼고 발달한 것이 사람의 기분에 삶에 가장 중요한것이 물이기 때문이고 이성계가 한강을 끼고 이씨조선의 수도를 세운 것도 사람에게 가장 필수가 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맑은 물을 마음대로 쓰고 먹으면서 세탁기로 빨래하고 살면서 한번도 그것으로 인하여 감사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까짓것 너도 나도 쓰는 세탁기가 뭐가 감사해? 이렇게 반문할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절대 만들 수 없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전에 아프리카에서 온 몇분의 목사님과 산을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한국에 산에서 졸졸 흐르는 물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물을 파도 석회수가 많아서 그물을 먹을수가 없고 그 우물로는 설거지 하고 빨래 하는 데만 쓴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물을 낭비할정도로 사용하면서 전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무례를 법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한국도 전에는 하나님께서 물을 많이 주셨어도 오늘날과 같이 시설을 가추고 사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기억을 해보니 저희는 1974 년도에 결혼을 해서 1977 년에 봉천동으로 이사 가기까지 신길동에서 살았는데 그 지역이 낮은 지역인데도 낮에는 물이 잘 나오지 않았고 밤에 모든 사람들이 물을 쓰지 않는 새벽 1 시나 2 시가 되면 부엌에는 나오지 않고 마당에 있는 목욕탕에만 쫄쫄 거리며 나왔습니다. 물이 콸콸 나오지 않으니까 한 통을 받는데도 한참 걸렸습니다. 당시에 저는 낮에는 유한양행에서 결혼 후 이년동안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낮에 일을 하고 밤에 잠을 자야 되는 시간에 물이 나오는 소리가 들리면 물을 길어 부엌으로 날렸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불행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살아야 하는 인생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우리의 행복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베트남에서 온 한 여성 외국인 노동자는 처음 쉼터에 왔을 때 수세식 양변기에서 세수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들으면 폭소를 하지만 그들의 환경과 물이 우리 양변기에 있는 물보다 더 수질이 좋지 않으니 그 자매가 세수 하기 위하여 담겨있는 물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한 해가 1977 년 봉천동으로 이사 온 후였는데 그해에도 큰 길은 도로 포장이 되어 있었지만 우리 집 앞은 아직 포장이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비가 오는 날 출근하려면 비포장도로에서 비로 질퍽거리는 길로 남편의 구두가 흙이 잔뜩 붇어서 큰길에서 털어내야 했지만 네팔의 거의 전체가 비포장 도로를 보며 우리는 받은 혜택을 참 감사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네팔의 도로는 우리나라 차가 하나 지나갈 정도의 도로에 양쪽으로 중앙선이 없이 달리면서 사이 사이 수 많은 오토바이가 뒤에는 가족을 태우고 달려가기에 밤에는 전기도 없는 비포장 도로에 서 있으면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쳐자보게 됩니다. 비포장 도로에 오토바이가 질주를 하니 먼지로 뒤덮히는데 시내에 두 개 정도 신호등을 보았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거의 무용지물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팔사람들은 참 부지런한것을 보았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살 때 말레이들은 오전 7 시면 그들에게는 아주 이른 새벽으로 느껴지는 게으른 민족성이었습니다. 네팔 사람들은 새벽 4 시에 일을 하러 나가고 길거리에 노상상인들도 아주 이른 새벽에 나온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하기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네팔사람들과의 노동계약을 오래 연장한 것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환경에서 살아도 우리처럼 자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혼도 우리같이 많이 가정이 깨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