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품
토요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 로이드 존즈 묵사님이 설교자로써 쓴 “성령론”과 빌브라이트가 쓴 “능력있는 삶과 성령” 이나 토레이가 쓴 “너희가 믿을 띠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책을 비교하면서 저 자신이 경험한 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실지 성령운동을 무디와 함께 일으켰던 토레이 목사님이 쓴 글과 학자나 설교자가 쓴 책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토레이 목사님이 쓴 책 중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교회를 찾아온 사람과 한 상담자가 상담을 하면서 죄인이라는 사실과 회개에 대하여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 토레이 목사님이 와서 이야기 하니 십분만에 울면서 회개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벹전 1:8)에는 그 놀라운 힘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양자의 영을 성령이 강하게 주기 때문에 그렇게 어떠한 환란이나 고난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알수 없는 새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주님 생각할때에
물질이나 생명이나 아깝지 않아요
주님위해 나는 살고 주님위해 일하며
주님위해 고생하며 주를 위해 죽겠어요
성령세례이후 이 찬양을 자나 깨나 부르며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시작된 25 년의 세월중에 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몰랐다면 “선교는 사명이다” “한참 선교하다보니 기쁨을 잃었어요” 더 심하게 표한하는 사람은 “피 토하고 피마르고” 이렇게 표현하지만 제게 있어서 주님과 동행하는 이 선교현장은 주님과 데이트 하는 즐거움에 어떤 어려움도 보이지 않고 달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며칠전 수요일에 리틀타이에서 말씀을 전하러 갔는데 준비찬양을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양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찬양만 듣거나 부르게 되면 눈물이 앞이 보이지 않게 언제 어느때나 쏟아집니다. 그 찬양은 주님께 대한 저의 대답이고 저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저가 말레이시아에서 정글에서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추방되었을 때 지금도 그때의 느낌이 생생합니다. 길에서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열대지방 특유의 화창했다가도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 너무 심하게 쏟아져서 차의 앞 창문이 보이지 않아 길 한쪽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앞 창유리를 와이퍼로 강하게 움직여도 전혀 보이지 않기에 움직일수가 없는데 그 빗물이 마치 제 눈에 쏟아지는 눈물 같았습니다.
두 주안에 가족을 두고 혼자만 한국으로 추방을 당해서 떠날 때 너무나 막막해서 눈물이 쏟아지는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헌것입니다. 세상에서 남이 부러워하는 축복을 받아서 예수를 믿고 싶다는 고백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래도 너가 주를 따르겠는갸 라는 질문에 대답의 찬양이 내 일생 소원이 주께더 가기 원합니다. 그 차원을 넘어서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더 가까이 원합니다. 찬양을 부르며 말레이시아를 쫓겨 난것입니다.
사도바둘은 자신의 선교여행보고에 우리에게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고후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고후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주님이 약속하시기를 이 세상에서 환난이 없고 면제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시며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이기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예쓰고 못자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지만 아버지의 품안에 기쁨은 이 모든 것을 능가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였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님은 왜 담요도 반장만 남겼고 동전 7 전과 옥수수 두홉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담요를 전혀 안쓸수 없으니 계속 주다가 한 장에서도 반을 나누어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며 이 선교의 현장에서 있다보면 그런 결단을 해야 할 수 많은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말레이시아 추방은 겉으로 나타나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지출이 몇천만원이나 나가는데 환자가 생겨서 그를 치료해 주러 병원에 가니 하나님이 주셨더라는 간단한 고백을 들으면 사람들은 참 재미있다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때마다 “믿음의 선한싸움”을 해야만 하는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엘리야가 마지막 아들과 함께 먹을것만 남긴 과부에게 엘이야에게 먼저 가져 오라고 했을대 그 마지막 먹을 것을 드려야 하는 결단은 사탄과의 싸움도 세상과의 싸움도 아닌 바로 자신이 믿는 것과의 싸움입니다. 사실 선교를 하면서 오랜 습관이 되어 크리넥스 한 장을 그냥 생각없이 한 장을 뽑아 쓰지 않게 되어 필요한 만큼만 잘러서 사용합니다. 그것을 통과 해본 바울이기에 감옥에서도 “나는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믿는 자를 알고 지킨다” 이렇게 당당히 승리하는 고백을 감옥에서도 할 수가 있고 자신의 아들 디모데에게 기록해 준 것입니다.
딤후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능히 지키실것을 안다는 고백은 죽음도 무서워 하지안는 사람만이 할수 있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온전히 주만 바라보고 갈수 있는 그 이유는 “아빠 아버지” 그 품안에서 외칠수 있는 특권입니다. 할렐루야!
그 기쁨을 아는 바울이기에 “결박한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하면서 외칠수 있었을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