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을 보면 기억이 나요
어느 날 기상청에서도 한해가 가장 눈이 많이 왔던 해를 2000 년 겨울이라고 발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그해 겨울이 생각이 납니다. 눈이 끊임없이 내려서 길은 온통 얼음판이었던 그해 겨울. 하루는 영하 20 도기 더 내려가는 기온을 기상청에서는 발포하고 얼마 만에 기록이라고 추위의 가상을 모두 떨었던 해였습니다.
그렇게 영하 20 도가 넘던 날 파키스탄에서 온 조엘이 자신의 여동생이 온다고 저에게 함게 인천 공항에 가서 태워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다른 제삼세계의 외국인들이 쉽게 입국 통과하지 않듯이 그 여동생도 얼마를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칠흑같이 어둡고 추운 밤 시간에 그 여동생이 나와서 태우고 빙판길을 운전을 하며 식사동 조엘이 세들어 있는 집을 향해 갔습니다. 조엘이 세 들어 있던 집은 옛날 교회 건물 옆에 비탈길을 올라가서 있는 이층 방이었는데 빙판에 차가 계속 뒤로 미끄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행용가방을 무겁게 들고 온 처지라서 몇 번을 미끄러지며 집에 까지 데려다 주어야 했습니다.
그해에는 윤권사님도 아직 선교회에 안오셨고 일년후에 오셔서 모든 환자들을 혼자 데리고 병원에 가는데 눈은 너무나 많이 와서 운전도 힘들고 택시 타기도 힘들었습니다. 차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외국인 환자를 병원으로 데리고 갈수가 없는데 그렇게 눈은 계속 왔고 환자는 연속으로 생겼고 처음이라 어느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할지도 모르면서 병원을 찾아다니고 그랬던 겨울이었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여행은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추억만 있지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억은 사라집니다. 그러다가 눈길을 보면 가끔 그해 겨울이 생각나곤 합니다.
처음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시작하면서 내게 가장 힘든 여리고성은 병원비를 어떻게 내느냐 환자를 어디로 데리고 가느냐가 일 순위가 아니고 직업을 구해 달라고 찾아오는 수 많은 외국인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두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외국인 고용이 법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지 않았고 외국인들이 교회를 찾는 목적이 하나는 병들었고 하나는 직업을 못 구해서 매일 받는 전화가 “마마, 나 일 없어요”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호소하는 전화였습니다.
평 평 내리는 눈을 보며 “하나님, 이렇게 많은 눈을 내리듯 그들의 일자리가 있으면 좋겠네요. 설사 공장을 지은들 이 많은 외국인들을 어디다 취직을 시키나요?” 그런 일을 해 본 경험이 없던 내게 힘든 고통으로 아버지께 투덜거렸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공장 중에 하나가 영등포에 있는 모 출판사입니다. 그 출판사는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출판사였습니다. 식사동이나 장항동 일 대에 모둔 중소 기업에 외국인들을 취직 시키고 더 이상 자리가 없을것 같던 그 시간에 인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E9 외국인 노동자에게 주는 비자가 인도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기에 인도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때는 인도사람들이 엄청 많았는데 처음 취직을 시켜 주고 환자를 고쳐 준 사람들이 인도사람들이라 그렇게 많이 왔습니다.
오늘 6 명 시켜 주고 이제는 숙제를 했나보다 하고 돌아서서 오면 또 여러 명이 일자리 필요하다고 전화오던 그때에 더 이상은 소개 해줄 데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서 아버지께 투덜대고 있는데 장항동 재활용공장에서 내가 뿌린 전도지를 보고 전화가 왔습니다. 그분은 그 공장주였는데 확시 외국인을 찾는 자신의 친구 공장이 영등포 모 출판사인데 소개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공장은 참으로 찾기가 힘든 위치에 주로 있습니다. 그 공장을 찾아갈 수가 없다고 하니 장항동에 공장 사장님은 에쿠스 차를 타고 저를 운전해 주기 위하여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출판사에 가니 그 공장은 외국인 노동자를 전혀 채용해 본 경험이 없어서 기숙사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기숙사를 마련해서 채용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많은 외국인을 쓴다고 하여서 “랄랄랄” 찬양하며 돌아왔는데 그 공장에서 전화가 다시 왔습니다. 외국인 채용하는 것을 취소하겠다구요.
다음 날 아침에 가족들을 출근시키고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하나님께 단단히 삐쳐서 누워 있었습니다. 이미 다 됐다고 공장에 갔다 오자마자 인도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특히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했는데 할말을 읽고 누워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공장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영등포 공장 근처에 방을 얻어서 기숙사를 마련했고 다음날 다시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춥고 미끄러운 길이었는데 처음부터 언제나 여러 가지로 도와주시는 박윤태집사님이 아침 출근길에 데려다 주고 출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승합차를 몰고 다니셔서 인도사람들을 잔뜩 태뤄서 가시는 것을 아침 일찍 배울 하던 일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습니다. 그렇게 취직을 시킨 사람들이 그해 일년동안 백 명을 넘게 시켰으니 우리 아버지 공장은 참 대단한 공장이지요?
그때 외국인들이 어설픈 한국어로 만든 말이 그들이 볼때 내가 사업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기도하면 전화가 오는 것을 보고 “마마 기도해요, 사장님 전화와요”라는 유행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로 수고하신 박윤태집사님에게 당시에 일곱살이였던 수진이는 자라서 금년에 당당히 이대 장학생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이것은 냉수 한그룻도 상을 주시기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상이십니다. 그래서 행복동은 항상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