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비난:
지난주에 예수님의 어린이의 사랑하는 모습과 그들을 안아주고 안수하시는 스킨쉽틔 효과를 살펴보았다. 이어서 비판과 비난이 주는 결과와 인정과 칭찬의 효과를 살펴보자. 사람은 이미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고 있고 또 그 죄책감으로 고틍울 받고 있는데도 어리석다든지, 또는 왜 그렇게 잘못했는가 라고 비판을 하면 전혀 어던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한다. 부모들은 훈계를 통해 아이들이 변화된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부모가 할 일은: 자녀에게 채찍질을 통한 훈육으로 엄격하고 무섭게 다루는 것보다는 내재된 정신적이고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는 일이다. 평안한 마음과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귀중하다는 마음을 느끼게 해 줄때 개발된다.
비판과 비난의 반대는 다른 사람에게서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적익이고 창의적인 것을 발굴해 주는것이다.
몰튼 캐시 목사님은 태어날 때에 뇌손상은 무능력하게 만들었고 또박뽀막 말하는 것을 잘 못했으며 손재주도 매우 서툴렀다. 그러나 그가 초등학교 5 학년이 되었을 때 그러한 그의 모습을 아주 긍정적으로 표현해 주는 선생님을 만나서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인생으로 바뀌었다고 고백을 하였다. 그렇게 말을 잘 표현 못하는 그에게 “활발한 상상력이 잠재해 있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그런 격려는 그에게 공부를 잘하게 되고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인생을 전환하게 되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라서 잠재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사랑은 잠재력을 볼 뿐만 아니라 잠재력이 나타나도록 돕는다.
인간의 본성을 모른다면 우리는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농부가 되려면 씨를 어떻게 뿌리고 관리하는 법 그리고 수확하는 법을 알아야 농부가 될수 있고 숫자를 모르는 사람이 회계사가 될수 없고 경험이 없는 의사는 돌파리 의사밖에 될 수가 없듯이 우리 자신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면 왜 곤고한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고 격려하고 이해하는 언어나 행동을 할 줄 모르는 본성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 우리 속에 사랑할 수 없는 내면의 구조를 새롭게 바꾸지 않는 한 늘 곤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롬7: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거짓되고 부패하고 선한 것이 거하지 않기에 우리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본성으로는우리의 결혼 생활과 자녀교육에 상처와 쓴뿌리가 남게 되어 있다. 모든 분노의 이면에는 거의 상처와 고통이 숨겨져 있다. 진정한 사랑은 상처받은 감정을 함께 나누며 감싸 주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속에서 우리 에게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종류의 추하고 이기주의적인 목소리들의 어둠의 영을 내어 쫓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시다.
인내 있는 사랑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한다.
몰튼 켈시목사님의 다음의 고백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
내 둘째 아들은 5 학년 때에도 읽기를 배우지 못했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우리는 마침내 한 특수 학교를 정했다. 아들은 사립학교에 보내달라고 하며 그 학교를 싫어했다. 그곳은 훌륭한 학교였으며 그들은 아들에게 종합적인 심리테스트를 했다. 그대 나는 테이블의 저쪽에 앉아서 심리학자로부터 이상한 질문을 받았다. “이 어인아이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게십니까?” “완고하고 고집센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말을 했다. ”이 아이의 문제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관심도 가지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의 온정과 애정을 보이려고 할 때 마다 이 아이는 나를 거절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심리학자는 ”내가 왜 아버지를 거절하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 애는 아버지가 어느 정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지 시험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열 한 살짜리가요?” 라고 나는 물었다. “네, 열 한 살짜리니까요.”
비록 아이가 나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하겠다고 마음으로 작정했다. 우리는 함께 말도 타기도 했고 비록 형편없는 손재주를 가졌지만 이이와 함게 목각도 만들고 아들이 좋아하는 다른 일도 하곤 했다. 그러나 진짜 전환은 비치에서 바다앞 모텔에 투숙하고 있던 어느 날에 생겼다. 그날 아침 나는 그의 방에 가서 “나와 함께 수영하려 가겠니?” 라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TV를 볼래요.” 라고 대답했다. 과거에 이런 대답을 들으면 거절당한 느낌은 있었으니 내 시간을 갖기 위하여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냥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자의 말을 듣고 난 후라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 아이가 나를 떠 보는것일꺼야. 웃겨가면서 아이를 설득해야겠어.” 나는 장난기 어링 태도로 아이를 데리고 바다로 갔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나올 때 아들은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가 이렇게 하는데 얼마나 긴 세월이 걸렸는지 모르겠어.” 그후 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에게 다시는 무엇이든 부탁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때를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 해 달라고 했다. “일곱살 때였어요. 아바ㅓ지는 샬록 홈즈의 책을 형하고 나에게 읽어주었는데 그 후 형이 집을 떠났는데 아버지에게 다시 그 책을 내가 읽어달라고 부탁했어요. 아버지는 그때 너무 바쁘다고 했고 그 다음날도 또 바쁘다고 했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어요. 그후 나는 다시는 아버지에게 부탁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마치 아들에게 심한 막대기로 맞은것 같은 상처를 주었는데 아버지는 기억조차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내심있는 사랑은 다시 회복하게 되어 아들에게 사과와 사랑을 고백하며 새로운 관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