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학교”
기도만큼 하나님이 주신 특권은 없는데 이 기도를 배우는 사람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 외에 정말 기도를 가르쳐 줄수 있는 선생님이 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로하는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지만 실지로 바로 우리 옆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성경은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 고 권면하는데 “성령” 을 빼고 기도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엡6:18]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성령은 우리가 어떻게 구할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롬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다음주 월요일 송학식품 예배시에는 저가 강택희목사님께 특송을 해 주실것을 말씀드렸더니 기쁘게 가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를 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알지 못하는 비밀까지도 가르쳐 주십니다. 강목사님은 70 이 넘으신 은퇴목사님인데 영어설교를 하신다고 하여 홀리 예배시에 한번 하신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냥 은퇴목사님이시거니 생각하고 곧 잊어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강목사님이 제게 전화를 해서 은퇴 목사님들이 모이는곳에 와서 간증을 해 줄수 있느냐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 모임은 화요일에 하는데 우리 중보기도모임과 겹치기에 저는 정중히 거절을 했습니다. 얼마후에 강목사님이 다시 전화를 하시면서 요청을 해서 저가 기도모임을 빠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두 번 뵙고도 그분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하루는 성령이 그분이 누구신지를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1968 년 저가 대학교 이학년때 노량진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고 그때 담당 목사님이 바로 강목사님이셨습니다. 이미 42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강목사님은 전에는 얼굴에 붉은 혹이 있었는데 그것을 수술을 해서 현재는 그 모습이 없습니다. 설사 혹을 수술하지 않으셨어도 42 년전에 뵌분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거의 그 모습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갑자기 노량진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던 그분의 셋방에서 사모님이 교사들을 불러서 차려준 밥상위에 메뉴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당시 가난한 시절이었기에 직접 빚으신 만두를 구운 한접시와 잡채등이 놓여 있는 밥상이었습니다. 옆에는 어린 애기가 뉘여 있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초대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놀라서 확인을 해 보기 위해 강택희목사님께 즉시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혹시 전에 노량진교회에서 시무하신적 있으세요?” “그렇지요” 라고 대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것이 너무나 놀랐습니다.
이제 다음 달부터 한달에 한번 강목사님이 오셔서 영어 설교를 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한달에 한번씩 베데스다 요양원에 가서 은주 의정이등 몇몇 분과 기도할 때 하루는 은주가 방언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난달에 은주가 방언기도를 할때는 아주 유창하게 언어를 구사 하는것을 보고 속으로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은주는 평소에 손과 발 중에 발가락 하나만 써서 문자도 보내고 글도 쓰고 있지만 언어장애도 있기에 말을 아주 똑똑하게 분명한 발음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한데 방언기도를 할때는 유창하게 언어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이민희선생님이 의정이나 은주가 방언을 하면 언어가 쉽게 유창하게 발음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이야기 한 대로 은주가 방언기도를 할때 그런것을 봅니다. 의정이도 방언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지난번 우리가 모여서 기도할 때 은주가 특별히 방언으로 기도하니까 언어에 전혀 장애를 못느끼도록 유창하게 기도를 울어가면서 하는 것입니다. 너무 크게 하니까 그 옆 방에서 노래방 시설을 해서 노래를 부르던 혜숙언니가 와서 우리 기도하고 있는 방문을 닫어 버리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은주가 고백하기를 방언을 받고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속이 시원해 진다는 고백을 하며 방언 받은 것을 아주 감사했습니다.
기도를 생각이나 말로 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못하는데 방언으로 하면 한시간 기도가 훌딱 지납니다. 한데 “방언” 만큼 논란이 많은 주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강대상에서 방언을 하면 아주 이상한 가장 하잖은 은사라는둥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많이 듣습니다.
또한 사람들도 방언을 못할 때는 좀 호기심으로 방언을 해 보고 싶어 합니다. 처음 방언 받았을 때는 아주 신기해하고 기뻐하는 것을 보는데 일단 방언을 받고 그 언어의 뜻을 통변하지 못할 때는 방언기도를 하면 자신이 아뢸 것을 충분히 아뢰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 거의 사용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 분위기가 방언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교회에 출석을 하면 더더욱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쓰는 모든 미사어구나 단어를 사용해야 기도를 제대로 하는 느낌입니다. 그런 연고로 방언기도의 유익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대로 기도하고는 대부분 기도응답의 기쁨을 별로 체험하지 못합니다.
한번은 연변 과기대 교수님들과 김우연감독외 다른 대학 학장 교수님들이 많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간적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교수면서도 외국에 명문대 출신인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중 한분 저가 아는 분도 미국에 MIT 출신입니다. 그날 다같이 “우리 통성 기도합시다!” 라는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 방언으로 기도를 깊게 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지식층에서는 방언은 마치 여자들 그리고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것을 취급하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것을 간주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바울은 최고의 지식층 중에 역사적인 인물 중에 한명인데 이렇게 고백을 했을까요?
[고전14: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성령안에서 기도할 때 사람들은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그냥 언어로 기도할때와 다르게 상대방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면 마치 상대방의 깊은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하면서 그 상대방의 마음을 느끼며 기도할 때 영혼이 주님의 손으로 살아나는 것을 보기에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기쁨이 되며 더 크게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외치게 됩니다.
또한 기도의 응답을 수시로 체험하면서 어떤 힘든 상황이 펼쳐져도 실망보다는 주님께 그 해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기도하면 우리는 늘 승리를 선포하게 됩니다. 찰스피니처럼 한 사람의 회심이 수많은 사람을 주 앞으로 이끌수 있는 그러한 기도를 배우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