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와서 어제는 사랑하는 딸과 함께 신생아 옷을 사러 스텐리 라는 곳을 갔습니다. 그곳에 옷들은 한국에 삼분지 일 값이면 살수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간것입니다. 우리 딸의 애기는 딸을 출산할 예정이고 필리핀에서 온 웬디의 뱃속의 아기는 아들을 출산할 예정입니다.
우리는 여아기의 옷을 구입하면서 웬디의 아기를 위하여 남자기의 못도 구입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웬디의 생각을 많이 하는 날이었습니다. 특히 웬디가 제 생각을 자리 잡은이유는 웬디는 저희 딸과 같은 나이이고 출산예정일도 같기 때문입니다.
웬디는 키가 작아서 8 개월 임신 한 모습을 보면 마치 앞으로 넘어질것 같습니다. 웬디를 생각하며 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웬디는 몇년전에 한국에 도착하는 날부터 수난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 돈을 벌러 온다고 푸른 꿈을 가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던날, 같이 세명의 필리핀 친구들과 한공장에서 일을 하기로 되어 있던 공장주는 사업을 문닫은것을 알았습니다.
비자를 받고 초청을 해서 사업을 할 예정이었던 그 중소기업이 망한것입니다. 얼마나 앞이 캄캄했을까를 상상할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공항에서 노동부 산하 고용센터가 우리 선교회 전화번호를 알고 연락을 해서 이런 사연들을 이야기 하고 저희 쉼터에 묵게 해 줄수 있느냐는것입니다. 그 세명은 그렇게 쉼터를 왔고 그곳에서 묵으면서 고용센터를 통하여 다른 공장으로 직업을 가질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바로 아기의 아빠가 될 베트남 남자를 만난것입니다. 외로운 외국인들은 쉽게 그렇게 이성에 노출된 상태입니다. 베트남 남자는 이십대의 아주 어린 남자인데 한국어도 영어도 서로 통하지 않는데 늘 웬디 방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교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공장에 갈때 마다 웬디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의를 주었지만 남녀가 자주 접촉을 하면 당시에는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고 임신을 하게 된것입니다.
처음 직업을 갖게 해 주었을때 밝게 교회를 나오던 웬디는 그후 교회에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들은 어렵고 힘들때마다 아버지집으로 돌아온 탕자와 같이 찾아오는것입니다. 유달리 심하게 입덧을 하여 토하고 쓰러지는 몸으로 찾아와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영양주사를 맞게 해 주었습니다. 웬디는 아기 아빠와 필리핀에 가서 살겠다고 하며 아기를 출산하고 한달만 있다가 아기 혼자 외할머니에게 맡겨서 양육을 시킬 계획입니다.
한국에 나온 외국인들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한국에 나오기가 힘들고 먹고 살기가 어렵기에 보통 애기를 출산하면 그런 식으로 합니다. 전에도 중국부부가 출산 예정일 가까운 날에 도움을 받기 위해 교회 근처에 방을 얻고 출산을 하였습니다. 물론 병원비와 출산을 도와 주었습니다. 그 애기 이름을 예수님을 찬미하자는 뜻으로 저가 예찬이라고 지어주어서 그 아기는 예찬이가 되었습니다.
웬디도 그와 같은 길을 가게 될것입니다. 저는 뱃속의 아기가 엄마를 떠나 다른 필리핀 친구의 도움으로 외할머니 손에서 외롭게 키워질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뿐만 아니라 웬디는 지난주에도 같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출산후에 혼자 조리를 할수가 있다는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나면 다시 공장에서 일을 하겠다는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가 필요할때마다 지금은 윤권사님이 데리고 갑니다. 그 모든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남자 아기가 태어날날을 생각하며 핑크색 옷대신 파란색 옷 한세트를 집으며 아마 그옷을 입고 필리핀으로 어린 심령이 두려운 마음으로 떠날것을 생각하며 홍콩에 한국보다 훨씬 많은 필리핀 여성들을 바라보았습니다.
홍콩에 주부들은 거의다 맞벌이를 하기에 필리핀 가정부를 채용합니다. 큰 아파트에는 그들을 위한 방이 뒷쪽으로 작게 있지만 집세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곳이기에 외국인들말고 홍콩 가정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은 작은 부엌에서 잠을 잡니다. 처음 그들을 보고 제가 선교를 시작한것이 86 년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홍콩에 방문하기 전날 밤에도 다른 필리핀 여성 그레이스가 방도 없고 일도 없다고 "마마 프리이스 헬프 미"라고 전화로 호소하던 목소리가 쟁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