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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증인이 되어라(4)

마마킴||조회 6,863

홍콩에는 필리핀사람들이 가정부로 일을 하고 한국에는 외국인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말레이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한참 건축 붐을 일으키는 건축현장에 많이 불법으로 와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에서 버스를 계속 갈아타서 일주일쯤 걸려서 전국 각지에서 말레이시아로 모여 왔습니다. 말레이시아 언어는 인도네시아 언어와 같습니다. 말레이 들이 원래 인도네시아에서 이주 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레이시아 언어를 배우면서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있는 곳에 가서 언어를 더 익히기 위해 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한편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와 함께 서투룬 언어를 연습했습니다. 그러다가 요하니스 라는 우리 아들과 동갑인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과 대화를 하던 중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요한복음 1:12 절의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우리는 한 아버지를 모시고 한 가족이라고 하니 요하니스가 제가 엄마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듣고 스칠 말씀인데 그 말이 제 영혼을 흔들면서 엄마라고 한다면 친 엄마인 경우 제 아들이 그렇게 더운 나라에서 아침은 굶고 건축현장에서 일한다면 엄마는 아들에게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고 그것을 계기로 그들에게 일주일에 한두 번 점심을 해서 가지고 갔습니다.

사십 명분의 도시락을 싸서 그 건축현장으로 가지고 갔는데 그곳은 낮 12 시면 시장을 닫기 때문에 새벽에 시장에 가서 신선한 재료를 사가지고 와서 그들에게 점심시간에 맞추어서 가지고 가려면 에어컨 시설이 되어 있는 부엌인데도 땀이 줄줄 흘러서 내렸습니다. 그렇게 가지고 가면 처음에는 그들은 저를 어려워 하다가 나중에는 “마마”라고 부르며 자신의 엄마가 해 준 밥을 먹듯이 기뻐하며 먹었습니다. 그때부너 제 명칭이 “마마 킴”이 되어서 지금도 외국인들이 그렇게 저를 부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제게 부탁하신 일을 하는 동안도 인생의 유라굴로라는 광풍은 우리를 무렵게 하려고 불어오곤 했습니다.

행27:14-15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첫 번째 유라굴로라는 광풍은 IMF 라는 아시아를 휩쓰는 광풍으로 왔습니다. 당시 말레이시아로 처음 갈 때 말레이시아 돈 링깃이 강세여서 저희 남편은 링깃으로 월급을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아들은 그때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서 달라로 바꾸어서 학비를 보냈는데 입학하고 얼마 있지 않아 링깃은 점점 약세가 되어 40% 이상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수입이 그만큼 떨어진다는것을 의미하고 당시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하고 있던 수 많은 유학생들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사태가 줄지어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에 신학생 한명을 돕는다고 제가 1350 만원을 따로 비축하고 있다가 가지고 갈 예정이었는데 잠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아들 등록금도 걱정일 때 그 돈을 남을 먼저 돕는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알고 있는것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이 주시고 맡겨 놓으신 것 아닌 것이 없는데 저는 신학생을 돕는데 모두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유라굴로라는 광풍은 우리 집을 비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혼자 공부할 때는 그만큼을 받게 하셨고 딸 까지 둘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그 만큼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의 센 유라굴로라는 광풍은 저가 정글에 선교사님들과 같이 갔다가 무슬림 종교 결찰에 잡힌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광풍도 저희를 위협하지는 못했습니다. 남편과 고등학교 다니는 딸을 두고 한국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말레이시아 기후는 갑자기 폭유가 오고 멀쩡하게 개이고 하는 스콜이 한 두 차례 오는데 그 비가 내리면 앞이 보이지 않아 차를 운전하기가 힘이 듭니다. 저는 그때 기억을 하면 그 내리던 비가 마치 흐르는 눈물 같던 기분이 느껴집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늘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찬송을 부르면서 특히 내 일생 소원은 보다 더 강한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계더 나가기 원합니다.” 라고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SUB교회 청년들과 리차드 삼포로 목사님은 저가 추방되어 떠나게 되었다고 저를 위한 송별회를 준비했습니다. 제게 선물을 내미는 그 손들을 보며 저는 삼주 안에 다시 돌아올터어니 이 선물을 줄 필요가 없다고 하니 그들의 얼굴에는 “어떻게 그런일이 있을수 있나요?” 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다시 보내실 것이라는 확신을 한 이유 중에 하나가 성경공부 교재를 번역만 하고 있었지 실지 인쇄 작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추방되는 사건이 터졌기에 저가 다시 말레이시아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경우 한국으로 와서 이름을 스펠링을 바꾸면 다른 사람으로 그곳에서 들어갈 수 있기에 그런 방법을 쓰던지 아니면 출입국 관계자들에게 돈을 주고 무마시키기도 합니다.

저는 정당한 방법을 해도 다시 말레이시아로 하나님께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저가 잡은 삼주 만에 돌아 갈 것이라는 기간은 저희 친정 부모님이 가족과 동반하지 않고 한국에 와서 너무 오래 체류하면 혹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게 될까봐 그 사건을 말씀드리지 않고 걱정 끼치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기간을 잡은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저는 친정집에 있으면서 부모님들이 눈치 cowl 않게 집 전화를 사용하여 말레이시아에서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묻지 않고 밖에 공중전화를 사용하여 물었습니다. 남편은 두주가 지나도록 그쪽 상황은 나빠지고 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두주가 지나고 셋째 주로 접어들었을 때 기적적으로 출입국 소장이 저를 불랙리스트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그렇게 역사를 하신 것입니다. 저가 정확하게 삼주 만에 다시 말레이시아로 돌아갔을 때 우리 가족은 물론 기뻐하였고 SUB 교회는 모두 놀랐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주로 청년들인데 직장에서도 하루에 다섯 번씩 무슬림 기도시간이 되면 크리스천으로서 그 기도에 동참하지 않으면 많이 무섭고 떨리는 기분을 제게 항상 고백하곤 하였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저가 다시 관광비자로 들어갈 수 없도록 종교적인 문제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돌아가니 모두 궁금해 했습니다. 저가 돈을 주고 돌아 왔나 편법을 썼나 물었습니다. 저가 어떤 방법도 쓰지 않고 오직 전늘하신 아버지께서 하신 것을 간증하였을 때 그들은 모두 믿음이 일취월장 하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곧 말레이시아에서 계약 기간 삼년이 끝나기 전에 그 사건은 저희 남편에게 다시 한국에 미국은행에서 직책을 주어지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제가 추방되어 다시 돌아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던 삼주가 되어 가던 수요일에 미국은행 이사회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희 남편은 저가 종고적인 문제로 한국으로 추방되어 아내가 없이 혼자 말레이시아에서 살수가 없기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또 감동시키셔서 한국에 다시 계약직으로 왔습니다. 홍콩에서 두 번째 갔을때 처음 삼년 그리고 이년이 또 연장되고 말레이시아에서 삼년 계약이 끝나고 다시 한국에 이년의 계약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게 된 시기는 저가 다시 말레이시아로 돌아가서 책을 모두 출판을 끝내고 역시 제가 걱정하는 자녀문제 저희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날 아들이 떠나고 장확하게 삼년이 지난 98 년 6 월 12 일이었습니다.

한국의 경제상황은 아주 좋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IMF로 경기 침체가 있던 시기에 돌아와서 역시 영업이 잘되면 보너스를 받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도 보장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의 상황이고 제 눈에는 한국에 저가 떠나기 전에 없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낯선 이방인이 아니고 저가 홍콩에서 섬기던 필리핀사람들,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 모도 구면의 한 가족 같은 반가운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홀리네이션스 선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