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요일4: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바울의 에베소 1 장 17 절의 기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을 나는 알고 있는 것일까? 어떤분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 성경을 좀 읽고 기도를 한다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인가?
성경을 읽을수록 하나님을 정의할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한참 열심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을 하기 위함인데 그 사랑을 빼고 다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많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의 자녀로 새로운 모습을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전에 교도소 안에서 간수들끼리 신우회 모임을 만들어 죄수들을 전도하는 이야기를 읽은 책이 기억납니다. 정말 고개가 수그러지는 많은 사랑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책의 내용에는 대부분의 죄수들은 순수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보통 대화를 나누기도 힘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거의 결손 가정과 상처로 쌓여 있어서 심지어 이쑤시개로 자신들의 입술을 그냥 뚫어 버릴 정도로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기에도 흉측한 가까이 가기도 무서운 죄수들을 위하여 이분들은 사도바울의 “차라리 내 이름이 생명록에 지워질지라도” 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수들 중에는 아버지나 아들로 집안에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데 교도소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이 굶고 있는 가족들을 찾아가서 쌀을 사다주며 먹을 것을 사다주면서 위로하고 사랑함으로 끝내는 사형수가 거듭나서 죽음을 앞두고도 회개하며 오히려 다른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이디 베이커가 쓴 글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내용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로 묻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신 그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으려면 사랑하는 법을 배웠느냐고 묻는다는 글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않는 심오한 질문입니다.
병원에서 소망이 없는 진단을 받고 있는 환자들은 거의다가 그 본래의 이미지가 얼굴에서 찾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 영혼의 자아는 외모 속에 가려서 한숨을 쉬며 주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베데스다 요양원에서 몸이 불편한 모습을 하고 있는 많은 장애인들을 보지만 사실 육신이 멀쩡하면서 정신이 장애인 들은 그 외모가 정상적인 생명의 빛을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보혈을 흘려 주신 것입니다. 그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비록 육신은 그러한 모습으로 장애인이라는 옷을 입고 있으나 영혼은 우리 보다 더 아름다운것이 바로 그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과 함께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새 생명을 소유했다면 이 새 생명은 다른 또 생명을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더 잘 알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끄러운 저의 모습을 많이 회개하였습니다. 왜 사랑의 특성 중에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고” 로 시작이 될까 묵상해 봅니다. 저 자신을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 주지 않았으면 이 영광의 구원의 반열에 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벧후3:9]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