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한 번도 나를
먼저 권사님의 권유로 이 글을 적게 하신 참으로 좋으신 나의 하늘아빠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빠께서는 1972년 5월 23일 어느 시에 어머니의 태를 통하여 저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들은 이야기로는 어머니께서 저를 낳을 때에 난산을 하셨다고 합니다. 아기가 죽어서 나왔대요. 그런 저를 아빠께서는 의사선생님의 손길을 통해 살려주셨지요. 아마도 주님께서는 저를 향하신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나봅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지금 저의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고이려 합니다. 이후 3살 때까지 걸음마도 하며 보통 평범한 아이처럼 잘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고혈이 나 병원에 가보니 의사선생님께서는 저의 뇌신경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어려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 때의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첫 딸은 살림 미천이라고 하는데 부모님께 저는 무거운 짐 덩어리였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지어주신 십자가인지도- 이런 저로 인해 부모님께서는 아빠께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으셨어요.
우리 의정이 좀 고쳐달라고, 저를 데리고 현신애 권사님 집회에도 자주 참석하셨어요. 어머니께서 못가시게 되면 할머니와 함께 가곤 했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집에 있을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저의 몸을 자주 주물러주시고 만져주셨습니다. 행아라도 사랑하는 딸의 몸이 굳어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그에 비해 별로 노력을 하지 않는 저였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매우 후회스럽습니다.
몸이 괴롭고 아파서인지 저는 자주 칭얼대며 짜증을 부렸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께서는 많이 속상해하며 안타까워 하셨어요. 어느 날은 제가 하도 울고 보채니까 어머니께서는 수건을 저의 입안에 넣으시곤 하셨습니다. [아마도 주변 분들에게, 시끄러워 패를 끼칠까봐 그러셨던 같습니다. 이때마다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너무 괴로워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열어 저를 죽지 않도록 지켜주셨습니다. 이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며 모두 잊어버렸다고 생각을 했었건만 지난 번 성전으로 내려가 권사님, 전도사님과 더불어 기도하는 시간을 갖던 날, 권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지요, 육신의 병을 고침 받기를 원한다면 우선 미움이나 원망이나 열등감이나 마음에 남아있는 앙금부터 하나님 앞에 모두 철저하게 내려놓고 용서받아야 한다는. 순간, 문득 위의 일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아니, 난 이미 잊은 일인 줄로만 알았었는데-’제가 그랬었더라고요. 하지만 이제는 더 많이 이해하며 헤아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의 사랑으로, 제 나이 열한 살 되던 해 봄 햇살이 가득한 오월의 어느 날, 저는 아는 분의 소개로 시립아동병원이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마냥 이 상태로 집에만 둔다면 의정이게도, 또 당신네 가정에도 아무런 발전이 없다며 그 곳으로 제가 가는 것이 낫다고 하시며 그 분께서는 며칠간 오셔서 어머니를 설득시키셨습니다.
일단 어머니께서는 저의 의건을 물으셨습니다. 병원에 가서 병을 고쳐 오자는 식으로, 전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시간, 언 듯 방문 밖을 나서 아저씨의 차에 올라타려 하니“으앙”하고 울음부터 터져 나왔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방 문지방에 스셔서 많이 우셨습니다. [아마 가슴으로 심한 통곡을 하셨던 같습니다. 그 시각, 동생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 한창 꿈나라 여행 중이었고 아버지께서는 마침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연유로 시골에 가계셨던 터라 뵐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부모님과 떨어져 다른 환경에 처하니 낯설음과 두려움이 교차해 많이 울었습니다. 집에 보내달라고 밥도 잘 먹지를 않은 체 몇 날 며칠 울기만 했을 뿐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너무 어려 철이 없었던 같습니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아빠의 은혜와 섭리 속에 차츰 곳 생활에 적응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의 언니들과도 사귀게 되었고, 참 정이 많아 따뜻한 분들이었습니다.
이 후로 긍휼의 하나님, 내 아빠께서는 저의 영혼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붙여주시고 만나게 하셨습니다. [마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시시적절 하게 내려주시는 것처럼] 아주 작고 여린 것이지만 신앙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셨어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주님의 사랑과 섭리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 중, 공태숙 언니라는 한 간호사 언니를 알게 하셨는데 이 만남 속애서 성경 말씀을 자주 접하게 되었고 찬양도 많이 배우며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찬양을 몹시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하셨듯이 찬양을 부르면 가슴 속에 있는 것들이 터져 나와 내 하늘아빠 앞에 그대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러기에 저는 예배 시간에 특송으로 찬양을 자주 올려드리곤 합니다. 비록 부정확한 발음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들을 순 없어도 [그러나 머지않아 누구보다도 더 아름다운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으로 찬양 드릴 수 있을을 믿고 주님께 먼저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나의 겉과 속을 친히 창조하신 주님께서는 모두 다 알아들으시고 이 마음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아주 가끔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언니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저녁 산책을 하곤 했었는데 그 때 맡았던 아카시아 향기는 아직도 저의 기억 속에 남습니다. 흔히 아카시야 나무는 아무 것에도 쓸모가 없다고들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시며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씀의 격려를 해주십니다. 저도 아카시야 향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고 높고 깁고 넓으신 사랑을 만방에 흩날리기를 소망해봅니다. 인간의 힘과 능이 아닌 오직 성령으로 말입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언니는 다른 병원으로 발령을 받아 그 곳을 떠나야했습니다. 우리는 많이 서운해 하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또 다른 만남을 위해. 그런 가운데 만남과 해어짐에 차즘 익숙해져갔습니다.
이러던 중, 늑막염이라는 병에 걸렸었는데 [주사바늘로 옆구리에 찬 물을 한 두 번 뽑아내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약물을 통해 치료해주셨어요. 부모님의 기도의 힘이라고 믿어집니다. <이 시절에는 아직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죠.]약이 얼마나 썼던지 한 목음 입 안에 들어갈 적마다 삼키지도 못한 채 헛구역질부터 나오기가 일수였으니까요. 생김새는 고춧가루에 물을 타 놓은 듯했어요.
주님의 은혜로 저는 15살에 한글을 깨우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병원 안에 특수교실이 있었는데 생님께서 직접 병실로 찾아오셔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저 외에 두 명이 더 함께 배우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지해를 주셔서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진도는 빨리 나가는 편이었습니다. 김기숙 선생님께서는 수업시간에 종종 책을 읽어주시곤 하셨는데 헬렌켈러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그 분께서도 아마 예수님을 믿는 분이 아니었나싶습니다. 그렇게 문자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몹시 신기하며 제미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고 자꾸 마음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 앞서, 주님께서는 저를 어동병원으로 데려다주셨던 분을 통해 집 소식을 접하게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목사님이 되셨다는, 순간, 전 너무 기쁘기도, 너무 어떨떨하기도 했답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기도하시던 중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주의 종의 길을 걷게 되셨다고 합니다. 다시 뒤로 돌아가서, 아빠께서는 마침 그곳에 손이 자유로운 친구 한 명을 보내주어서 대필을 해달라고 부탁해 <나의 꿈>이라는 한 편의 시를 처음으로 적게 되었어요. 오랜 시간이 흘러서 기억은 잘 나지를 않지만 내용은 대충 이러했습니다.“어제 밤 꿈속에 나는 나는 날개 달고 천사와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 올라올라갔지요 예수님의 손목을 잡고 하늘나라 이 곳 저 곳을 구경했어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혔어요”이것을 우연치 않게 소아과 과장님이신 황명자 선생님께서 보시고 성령님의 은혜로 감동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후로 긍휼의 하늘아빠께선 황 선생님으로 하여금 많은 사랑과 관심을 보이시게 하셨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질투를 할 정도로] 그러던 어느 날, 황 선생님께서 집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문득 던지셨습니다. 전화번호를 수소문한 끝에 가족들을 찾게 되었어요. 하지만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그 곳을 나와야 했어요. [왜냐하면 그 곳은 연고자가 없는 사람만이 입소가 가능했기에] 경기도광주에 위치한 한사랑 마을이라는 시설로, 병원 생활을 하다 이곳에 오니 마치 천국 같고 참 좋았어요. 가족적인 분위기가, 한 방에 4-5명이 생활했으니까요. 그 곳은 거의 다 어려서 보모 선생님을 대부분 엄마라고 불렀어요. 교회 동아리 언니 오빠들이 격주로 토요일마다 봉사를 와 식사 보조도 해주며 예배를 드리며 산책도 시켜주었어요, 때 배운 찬양 중, <똑바로 보고 싶어요> 라는 찬양은 저의 주제곡이 되어버렸답니다.
시간은 흘러 며칠이 지난 후, 외출 허락을 받아 부모님을 만나 뵙기 위해 황 선생님 댁으로 갔습니다. [당시 집으로 갈 형편이 여의치 않았었기에]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한 편으론 너무도 오랜만에 하는 상봉이어서 약간은 서먹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의 흐름 따라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은 많이 변하셨고 말씀을 하시는데 기도를 하셔서 목소리가 많이 시여 게셨습니다. 순간, 핑 도는 눈물이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얼마나 간절한 기도의 눈물을 뿌리셨기에, 순간,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마음으로] 한사랑 마을에도 특수학교가 있었습니다.
저를 맡고 계신 김주윤 담임선생님을 통해 입에 나무젓가락을 물고 타자 연습을 하게 되었어요, 낮 시간에는 수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거의 저녁식사를 마친 후, 승강기를 타고 교실에 내려가 연습을 하곤 했었습니다. 저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늦은 시각에 퇴근하시는 일이 잦으셨어요. 저를 생활실로 올려 보내고 가셔야 했기에, 참으로 주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아니었다면 결코 가능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후로 선생님께서 컴퓨터를 생화로 올려 보내주셔서 일기를 매일 적을 수가 있었어요, 간간히 씨나 수필도 적어가곤 했으나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의 중심은 거의 세상 적이고 육신적인 것들뿐이었답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저는 22살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차서 한사랑 마을을 나와 집으로 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영적훈련은 시작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말씀 읽는 것을 우선시 권하셨고 저는 종종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드리곤 했답니다.“사람이 어찌 한 가지만 먹고 살아요, 이것저것 음식물을 골고루 섭취해야 몸이 건강한 거지“라고 말입니다. 이러 던 제가 메일 밤, 비디오테이프로 철야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 차츰 닫혀 있던 심령이 열리게 되었고 이 틈으로 생명의 싹이 터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에 갈 수가 없어 늘 덩그러니 집에 남겨져 비디오를 나 홀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교회에 가 당신 앞에 예배도 드리고 싶고 기도도 드리고 싶어요, 왜 전 늘 저라는 존재를 숨기며 쉬쉬하며 살아야 하나요?, 장애라는 것은 죄가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선 저를 어디에 사용하시려고 하시나요, 저는 이렇게 살다가 아버지께로 가고 싶지 않아요. 성령님, 저를 주님의 도구로 사용해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인격적으로 만나 주신 것은 1996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가족들이 모두 다 교회로 떠나고 혼자 거실에 덩그라니 남아 비디오 말씀 테이프로 예배를 드리던 중,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는 내거 너와
함께하는데 무엇을 외로워하며 두려워하고 슬퍼하느냐, 다른 사람들은 너를 다 이해할 수 고 알지 못하나 나는 너를 조성하지 않았느냐 나는 너의 깊은 속까지도 꾀뚤어 보고 있단다. 너는 나의 안에 거하라 세상이 이혜하지 못한 알지 못하는 자유함과 기쁨과 평안함을 얻으리라“고요. 수간, 심령이 뜨거워지며 한없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회개와 참회의 눈물이,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하늘아빠께서는 그렇게 저의 생명을 건져주신 것입니다. 연약하고 초라한 저를. 하루하루가 다르게 하늘아빠께서는 말씀과 기도로 통해 저의 신앙을 성장시켜주셨습니다.
마른 뼈들에게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강한 군사가 되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세상 중심적인 생각이 하늘아빠 중심으로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우리 생명 양식인 더욱 사모하게 되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어졌습니다.
이상 밥만 축내는 생활은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음이 간절했습니다. 주님의 일에도 방해가 되고, 이런 끝에 아빠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삼일 금식을 작정했습니다. 이런 후, 어머니께 저의 소견을 말씀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 마음을 먹었느냐 하시며 만류하셨지만 제가 끝까지 마음을 접지 않으니까 어머니께서 저주셨습니다. 시설을 알아보게 되셨으며 이 곳 베데스다 요양원으로 아빠께서는 저를 인도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이 갈급하며 영적으로 갈급하여 몹시 힘이 들기도 했으나 지금은 인터넷으로 어느 때든 영의 양식을 섭취할 수 있어 하늘아빠께 너무 감사하며 기쁘답니다. 또한 본래 품었던 소망대로, 부족하지만 찬양 시로 아빠 앞에 영광 돌리도록 허락해주셨답니다. 하늘아빠께서 앞으로 저의 발걸음을 어느 길로 인도하실지 저는 알지 못하지만 아빠의 신실하심을 믿습니다. 외로울 때나 기쁘고 슬플 때, 병들고 아플 때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저를 바라보시고 인도하시는 성령하님, 찬양하며 사랑합니다. 한 번도 저를 놓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던 하늘아빠께 이 찬양을 올려드리며 저의 간증을 마칠까합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시키셨네
오 진실하신 주 오 진실하신 주
내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진실하신 주 오 진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시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아멘